역사이야기/영국

[The White Queen] 레이디 시슬리 네빌 : 요크 공작부인

엘아라 2013. 10.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워윅 백작할려고 했는데 읽을것이 너무 많아서 에드워드 4세의 어머니인 요크 공작부인 시슬리 네빌을 할까합니다. 시슬리 네빌을 하면 꼭 빼놓을수 없는것이 바로 에드워드 4세의 출생과 관련한 문제입니다. 에드워드 4세는 실은 요크 공작의 아들이 아니라 프랑스 궁수와 불륜을 저질러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이야기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Proud Cis"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시슬리 네빌이 신분이 낮은 다른 남자와 동침을 했을거라고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답니다. 

에드워드 4세에 대한 시슬리 네빌의 행동에 대해서는 감정이 격해지면서 정치적 문제가 결합될경우 그럴수 있다고 생각한다죠. 솔직히 빅토리아 여왕과 켄트 공작부인도 여왕 치세 초기를 보면 장난이 아니거든요. 켄트 공작부인은 딸의 정치적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으며 여왕 역시 어머니에 대한 편견으로 인해 삐딱하게 행동하더라구요.--;;;;;



[The White Queen] 레이디 시슬리 네빌 : 요크 공작부인




레이디 시슬리 네빌

요크 공작부인

Lady Cecily Neville, 

Duchess of York 

(3 May 1415 – 31 May 1495)



레이디 시슬리 네빌은 1대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이었던 랄프 네빌과 그의 두번째 부인인 레이디 조앤 보퍼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랄프 네빌은 리처드 2세때 군인이었습니다만, 후에 볼링블룩의 헨리(헨리 4세)와 리처드 2세 사이가 나빠질때 그는 처남이었던 헨리를 지원했으며 결국 헨리 4세가 즉위한뒤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이 되죠. 조앤 보퍼트는 랭카스터 공작이었던 곤트의 존과 그의 정부였으며 후에 세번째 부인이 되는 캐서린 드 로애(캐서린 스윈포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났을때는 부모가 정식으로 결혼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녀 역시 다른 형제들처럼 "보퍼트"라는 성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첫번째 남편이 죽은뒤, 부모가 결혼했고 교황과 의회의 정식 승인이 있은후 랭카스터 공작의 적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뒤에 그녀는 랄프 네빌과 재혼했었죠.

이런 가족관계때문에 시슬리 네빌은 후에 아들을 국왕으로 만들었던 '킹메이커" 워윅 백작 리처드 네빌의 고모였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국왕이었던 헨리 4세의 조카이자 헨리 5세의 사촌이기도 했습니다. 또 랭카스터 가문의 국왕들이 즉위했던 시절 권력을 잡았던 보퍼트 가문 사람들은 시슬리 네빌과 가까운 친척관계이기도 했었죠. 이를테면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의 할아버지였던 존 보퍼트는 시슬리 네빌의 외삼촌이었죠.



웨스트모얼랜드 백작과 두부인

왼쪽이 레이디 조앤 보퍼트라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두 부인은 남편과 함께 묻히지 않았습니다. 조앤은 어머니인 캐서린 스윈포드와 함께 묻혀있죠.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은 1424년 9살의 막내딸 시슬리를 13살의 3대 요크공작 리처드와 약혼시킵니다. 요크 공작은 성인이 되기전 부모가 사망했으며 백부로부터 요크 공작령을 물려받은 상속자였습니다. 이런 미성년의 상속자에게는 국왕이 지정한 후견인이 붙는데, 그의 후견인 중 한명이 바로 웨스트모얼랜드 백작이었죠. 그리고 그는 자신의 딸을 요크 공작과 약혼시켰죠. 랄프 네빌이 죽은뒤 요크 공작의 후견인 자격은 그의 부인이자 시슬리의 어머니인 웨스트모얼랜드 백작부인에게 이어졌으며, 결국 1429년 시슬리는 요크 공작과 결혼합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


첫아이인 앤이 1439년 태어났으며 이후 여러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1442년 루앙에서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습니다만 태어난 다음날 간단한 세례식을 받게 합니다. 이것은 후에 워윅백작과 에드워드의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가 요크 공작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게되는 증거중 하나로 받아들여집니다. 에드워드의 동생인 에드먼드가 태어났을때 매우 화려한 세례식을 했던것과 대조 되기 때문에 "적자"가 아니었기에 세례를 서둘러 치뤘다는 것이죠. 또 당시 요크 공작이 아내를 떠나 전장에 있었던것도 에드워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원인이 됩니다. 세실리가 임신했을시기 요크 공작이 전장에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신빙성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기였기에 아이가 태어나면서 서둘러 세례를 받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죠. 또 시슬리는 루앙에 살았으며 프랑스에 있었던 요크 공작은 자주 아내를 보러 올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요크 공작은 에드워드를 자신의 적자로 인정했었습니다.


장미전쟁이 일어나자 시슬리는 좀 복잡한 관계에 놓이게 됩니다. 남편과 아이들은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요구자들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랭카스터 가문의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죠. 기본적으로 시슬리는 남편과 아이들의 계승권을 지지했습니다만, 이런 상황은 그녀가 남편과 국왕 사이의 중재를 시도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의 영지를 몰수당한 뒤에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데는 성공하죠.


1460년 6월 남편과 아이들의 왕위계승을 인정받은뒤 시슬리는 런던으로 돌아왔으며 왕비의 시녀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12월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요크가문이 패배했었으며 시슬리의 남편인 요크 공작,둘째아들인 에드먼드.오빠이자 "킹메이커"의 아버지였던 5대 샐리스버리백작 랄프 네빌등이 전사합니다. 시슬리는 12살과 8살이었던 두 아들 조지와 리처드를 안전을 부르고뉴로 피신시켰었습니다.


하지만 시슬리의 장남인 에드워드가 랭카스터 가문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가 왕위에 오르자 시슬리는 국왕의 어머니로써 권력을 얻었으며 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녀는 아들의 지위와 자신의 지위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남편인 요크 공작이 정당한 국왕이었음을 주장했고 자신 역시 정당한 왕비였음을 주장하고 이를 자신의 문장에 표현했으며 에드워드 역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어머니의 문장을 인정해줬습니다. 이것은 결국 시슬리가 아들의 궁정에서 사실상 "Queen Mother"로 인정받았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4세


1469년 시슬리의 조카인 워윅 백작이 반란을 도모하면서 에드워드 4세가 요크 공작의 적자가 아니라 루앙의 궁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했었습니다.이것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조지가 정당한 왕위계승자라는 주장이었죠. 하지만 이미 워윅백작은  앙주의 마거릿에 대해서도 똑같은 소문을 퍼트린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재미난것은 이 문제에 대해서 시슬리가 공식적으로 거의 언급한것이 없다는 것이며 심지어는 에드워드를 서자로 인정하고 그 동생인 조지에게 왕위계승을 하게 하려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자신의 부정을 인정하면서까지 조지를 왕위에 올리려했었던것이기에 에드워드의 출생에 대한 논란은 물론 그녀가 에드워드보다 조지를 편애했었다는 이야기들이 나오게 만듭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오만한 시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시슬리가 겨우 평민 출신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아들에게 등을 돌린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조지와 리처드는 모두 자신의 조카인 워윅백작의 딸들과 결혼했으며 이들은 혈통상으로도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었기 때문이었죠.



클라렌스 공작 조지

에드워드 4세의 동생


어쨌든 이런 상황은 결국 이후 워윅 백작의 반란이 진압되고 에드워드가 다시 복위한뒤 어머니와 거리를 두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시슬리는 아들의 궁정에서 떨어져서 자신의 개인적 관심사에 더 집중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시슬리는 에드워드 4세가 죽고 난뒤, 리처드 3세가 즉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녀는 에드워드 4세의 아들들이 적자가 아니라는 리처드 3세의 주장을 지지했었다고 합니다. 시슬리는 리처드 3세의 왕비이자 조카의 딸이었던 앤 네빌과는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고 아마 이때 궁정으로 다시 돌아왔었을듯합니다.


하지만 리처드 3세는 결국 1485년 전투중 사망했으며,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 7세가 즉위합니다. 그는 시슬리의 손녀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했었죠. 어쨌든 시슬리는 남편과 아들 모두가 죽은뒤에도 살아남았으며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결국 랭카스터 국왕이 왕위에 오르는것을 지켜봐야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정치와 떨어져 종교와 자선사업에 집중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1495년 요크 공작부인 시슬리는 사망했으며 그녀는 남편인 요크 공작 리처드의 옆에 묻혔습니다.



리처드 3세

시슬리의 막내아들



이후 잉글랜드-영국의 국왕들은 모두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결국 시슬리 네빌역시 잉글랜드-영국 국왕들의 선조가 됩니다.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

2.http://www.nationalarchives.gov.uk/pathways/citizenship/citizen_subject/neville.htm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