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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hite Queen]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

엘아라 2013. 10.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에 대해서 나오는데 머리가 깨질듯하네요..아하하..

이 분이 룩셈부르크 가문 출신인데 중세의 룩셈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할 정도의 대단한 가문이었거든요.

하여튼 꼬인 족보부터 파봐야할듯합니다.--;;

그런데 초상화가 없어요..ㅠ.ㅠ


[The White Queen]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



룩셈부르크의 자퀘타

베드퍼드 공작부인

리버스 백작부인

Jacquetta of Luxembourg, 

Countess Rivers 

(1415/1416 – 30 May 1472) 

생-폴 백작의 문장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평민"출신이었기에 말이 많았습니다만, 그녀의 어머니였던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통치 백작의 딸으며 그녀의 가문은 중세시대 매우 힘있는 가문중 하나였었습니다.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는 생-폴 백작이었던 피에르 드 룩셈부르크와 그의 부인인 마르게리타 델 발조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자퀘타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일원이었는데 이 가문은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중심으로 북부 독일과 저지 주들,남부 프랑스 영역까지 통치했었던 가문이었죠. 자퀘타의 아버지는 아버지로부터 생-폴 백작령을 어머니로부터는 브리엔느 백작령을 물려받았던 인물이었죠. 자퀘타의 가문은 비록 방계가문이긴 했지만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이 룩셈부르크 가문에서 나오고 있었으며, 생-폴 백작령 역시 플랑드르에서 중요한 백작령중 하나였기에 나름 중요한 가문이기도 했었습니다.

 

 

 

자퀘타의 숙부

장 2세 드 룩셈부르크-리니

그는 잔다르크를 잉글랜드에 판 인물로 잘 알려져있다고 합니다.

 

 

자퀘타는 1433년 17살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헨리 4세의 셋째아들이었던 44살의 베드퍼드 공작 랭카스터의 존과 결혼합니다. 자퀘타와 베드퍼드 공작의 결혼은 아무래도 생-폴백작의 영지가 플랑드르 지방에 있었던것과 관계가 깊을듯합니다. 영국은 여전히 프랑스와의 전쟁을 했었고 이런 상황에서 플랑드르쪽의 지지기반을 얻는것이 중요했었을듯합니다. 또 자퀘타의 먼 친척이었던 지그문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것도 어느정도 작용했을듯합니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은 결혼 2년뒤 적자를 얻지 못하고 루앙에서사망했으며, 자퀘타는 남편의 재산을 상속받아서 매우 부유한 과부가 됩니다.

 

 

성 조지에게 기도 중인 랭카스터의 존


 

헨리 6세는 기사이자 베드퍼드 공작의 시종 무관의 아들이었던 29살의 리처드 우드빌을 보내 자퀘타를 루앙에서 잉글랜드로 데려오게 합니다. 이 둘은 이렇게 만났으며 잉글랜드로 오는 동안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둘은 국왕의 허락없이 결혼합니다. 이것은 자퀘타의 재산과도 관련이 있는데 남편이나 남성 직계 후계자가 없는 상속녀의 재산은 국왕이 관리하게 되어있었기 때문이죠. 둘의 결혼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을때 헨리 6세는 자퀘타의 지참금을 내주는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자퀘타와 리처드 우드빌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둘 사이에 열두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됩니다.

 

1440년대가 되면서 자퀘타와 그녀의 남편은 궁정에서 지위가 올라가게 됩니다. 왜냐면 국왕인 헨리 6세는 앙주의 마거릿과 결혼했는데 자퀘타는 이 둘과 친척관계였기 때문이었죠. 자퀘타는 헨리 6세의 숙모였을뿐만 아니라 앙주의 마거릿의 숙모였던 이사벨은 자퀘타의 여동생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복잡한 정치관계 때문에 마거릿은 자퀘타를 신임했고, 이때문에 자퀘타와 그녀의 남편은 궁정에서 안정된 지위를 보장받을수 있었죠. 결국 리처드 우드빌은 세습귀족지위까지 얻게 되죠.


 

 

앙주의 마거릿

 

 이렇게 "랭카스터 가문"편이었던 자퀘타와 그녀의 가족들은 하나의 계기를 통해 "요크 가문"으로 편을 바꾸게 됩니다. 바로 자퀘타의 장녀인 엘리자베스 우드빌때문이었죠.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랭카스터 가문의 가신과 결혼했지만 전투중 살해당합니다. 그리고 두 아이의 엄마였지만 매우 아름다웠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자였던 에드워드 4세와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드워드는 가장 가까운 지지자였던 워윅 백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왕비로 대관하게하죠.

 

딸이 왕비가 되면서 자퀘타의 궁정내 지위는 엄청나게 높아지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아버지에게 "백작"지위를 주게 하죠. 자퀘타는 전 남편으로부터 상속받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고 이것을 자녀들과 손자손녀를 위해 사용합니다.  자퀘타는 딸과 함께 우드빌 가문 사람들이 궁정내에서 지위를 얻도록 힘을 썼는데, 그중 한가지가 20살이었던 아들 존을 노퍽 공작부인이었던 캐서린 네빌과 결혼시키는것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캐서린 네빌은 랄프 네빌과 레이디 조안 보퍼트의 딸로, 에드워드 4세의 이모였으며, "킹메이커"라는 별명의 워윅백작 랄프 네빌의 고모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때문에 존 우드빌과 레이디 캐서린 네빌의 나이차는 무려 40살 이상이었으며, 이런 기묘한 관계는 우드빌 가문 사람들이 "권력에 눈이 어두웠다"라고 여기게 되면서 사람들에게 나쁜 인상을 남기게 되죠.

 

 

 

요크 가문의 궁정에서 입지가 약했었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형제 자매들의 지위를 높이려 힘썼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그녀에 대해 더 부정적 인상을 가지게 했었습니다.


 

우드빌 가문 사람들은 요크 가문과 그 가신들과 사이가 나쁘게 됩니다. 우드빌 가문 사람들은 원래 랭카스터 가문과 연결된 사람들이지만,이제 국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요크 가문의 세상에서도 권력을 차지하려 하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이죠. 이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 이들이 바로 워윅 백작과 에드워드 4세의 두 동생들이었습니다.

1469년 워윅백작은 에드워드 4세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이해 자퀘타의 남편인 리처드 우드빌과 그녀의 아들인 존 우드빌이 워윅 백작에 의해서 처형당하죠. 남편과 아들을 잃은후 자퀘타는 큰 충격에 빠졌으며 , 남편이 죽은 3년후 자퀘타 역시 사망합니다.


자퀘타는 남편이 죽은 직후 "마녀 행위"를 했다고 비난받게 됩니다. 그리고 리처드 3세는 자퀘타가 마법을 써서 딸과 에드워드 4세가 사랑에 빠지게 했다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만, 명확한 증거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자퀘타는 중세 마녀로 몰렸던 다른 여성들처럼 과학이나 의학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으며 이 지식을 활용했었던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