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어머니인 룩셈부르크의 자퀘타를 할려다가 위키에 초상화도 없고 해서 그냥 일단 남편인 에드워드 4세이야기를 잠깐 해볼까합니다.
제가 전쟁이야기를 머리 깨지게 싫어하는 관계로 이것저것 막 건너뛸겁니다.
ㅎㅎㅎㅎㅎ
[The White Queen] 에드워드 4세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Edward IV
(28 April 1442 – 9 April 1483)
1520년경
1470년대 원본을 다시 그린 그림
영국의 에드워드 4세는 요크 공작이었던 리처드와 그의 부인인 시슬리 네빌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매우 복잡한 가계를 통해 플래태지넛 가문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크 공작 리처드와 그의 부인인 레이디 시슬리 네빌
요크 공작 리처드는 에드워드 3세의 아들들인 클라렌스 공작과 요크 공작의 후손이었으며, 시슬리 네빌은 역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입니다.
에드워드 4세의 아버지였던 요크 공작 리처드는 1대 요크 공작이자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이었던 랭리의 에드문드의 손자였습니다. (에드워드 3세-요크공작 에드문드-캠브리지 백작 리처드-요크 공작 리처드-에드워드 4세) 하지만 요크 공작이었던 랭리의 에드문드는 랭카스터 공작이었던 곤트의 존의 동생이어서 요크 가문 자체는 랭카스터 가문보다 왕위계승권에서 떨어져있었죠. 하지만 요크 가문의 왕위계승권이 랭카스터 가문보다 더 높게 된것은 바로 에드워드 4세의 할머니였던 앤 드 모티머 때문이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의 손자였던 캠브리지 백작 리처드와 결혼한 앤 드 모티머 역시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었는데 그녀는 랭카스터 공작의 형이었던 클라렌스 공작인 앤드워프의 라이오넬의 후손이었기에 그녀의 후손이었던 요크 공작가문 사람들은 랭카스터 공작보다 더 높은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었습니다. (에드워드 3세-클라렌스 공작 라이오넬-클라렌스의 필리파-마치백작 로저 모티머-앤 모티머- 요크 공작 리처드 -에드워드 4세)
그런데 가계도상 재미난 점은 에드워드 4세 역시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어머니인 시슬리 네빌은 랭카스터 공작인 곤트의 존과 그의 세번째 아내였던 캐서린 드 로애(캐서린 스윈포드)의 외손녀였기 때문이죠. (에드워드 3세-랭카스터 공작 존 - 조앤 보퍼트-시슬리 네빌-에드워드 4세)
이런 혈통은 에드워드 4세를 비롯한 요크 공작 리처드와 시슬리 네빌 사이의 자녀들이 랭카스터 공작의 후손이었던 국왕 헨리 6세보다 더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었죠.
에드워드의 삶의 초기는 그냥 평온했었을듯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헨리 6세 통치시절 초기에는 국왕과 대립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이죠. 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헨리 6세의 섭정으로까지 일했었습니다. 하지만 곧 요크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과 대립관계가 됩니다. 에드워드의 아버지인 요크 공작 리처드는 1460년 12월에 전투중 사망했고 에드워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을 주장하게 됩니다.에드워드는 친척이었던 워윅백작 리처드 네빌(일명 킹메이커)의 도움을 받아 1461년 잉글랜드의 국왕이 됩니다.
에드워드 4세
17세기
하지만 에드워드와 워윅 백작간의 관계는 틀어지게 되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에드워드 4세가 평민 출신이자 랭카스터 가문 가신의 아내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것 때문이었죠.워윅백작은 국왕이 유럽의 다른 왕가의 공주와 결혼하길 바랬었습니다만, 에드워드 4세는 엘리자베스 우드빌과의 결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합니다. 결국 워윅백작은 앙주의 마거릿과 손을 잡고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헨리 6세를 다시 국왕으로 세웠고 에드워드는 국왕 지위에서 물러나서 부르고뉴로 망명해야했었습니다.
에드워드 4세와 그의 왕비인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아들
당시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은 에드워드의 매제였습니다.(샤를의 아내인 요크의 마거릿은 에드워드 4세의 누이동생이었습니다. 후에 샤를이 죽은뒤 의붓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가 프랑스에 곤경에 처했을때 오빠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에드워드를 도울 생각이 없었지만, 프랑스는 부르고뉴에 선전포고를 했고 결국 이것은 에드워드가 잉글랜드로 돌아가 왕국을 되찾아야 하게 만들죠.
에드워드는 소수의 인원으로 잉글랜드로 돌아갔으며 자신의 공작령의 중심지인 요크시로 가서 병사들을 모집합니다. 그리고 왕위를 되찾기 위한 전투를 하게 되죠. 결국 1471년 5월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왕위를 되찾게 됩니다. 이 전투에서 헨리 6세의 외동아들인 웨일즈 공이 전사했고, 헨리 6세도 며칠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결과 랭카스터 가문에서 왕위를 주장할수 있는 사람은 단 한사람인 헨리 튜더 밖에 남지 않게 되죠.
헨리 6세와 앙주의 마거릿
에드워드 4세는 형제들간의 다툼을 겪게 됩니다. 에드워드의 두 동생인 클라렌스 공작 조지와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는 워익 백작의 두 딸들인 이사벨 네빌과 앤 네빌과 각각 결혼했었습니다. 이 둘은 상속녀였는데 이 상속 문제때문에 형제들간의 사이는 갈라지게 되죠. 결국 조지는 1478년 국왕에 대한 반역혐의로 체포되어서 처형당하게 됩니다.
형제들간의 다툼을 제외하고는 에드워드 4세의 왕권에 도전할 만한 사람은 잉글랜드 내에서는 없었기에 (헨리 튜더는 망명중이었습니다.) 그는 이제 대외사업에 다시 눈을 돌리게 됩니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을 다시 재개하기도 했었으며 스코틀랜드 왕위계승 문제에 대해서도 관여하기도 했었죠. 그의 대외 정책은 그다지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평가였지만 그는 늘 인기있는 국왕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건강은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1483년 부활절에 갑자기 쓰러졌으며 결국 그해 4월 9일에 사망합니다.에드워드는 죽기전 여러인물들은 자신의 뒤를 이을 어린 아들의 후견인으로 뒀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바로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였다고 합니다.
2013년 드라마 The White Queen에서의 에드워드 4세
그는 바람둥이이긴 하지만 아내인 엘리자베스 우드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나옵니다만, 아내와 동생 조지의 갈등이나 형제들 간의 갈등에 고통받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1.위키 미디어 커먼스
2.BBC one the white queen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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