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17)안스바흐의 카롤리네 : 조지 2세의 왕비(두번째)

엘아라 2013. 9. 2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의 왕비들...(17)안스바흐의 카롤리네 : 조지 2세의 왕비(두번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영국의 캐롤라인 왕비

조지 2세의 왕비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1 March 1683 – 20 November 1737)

1716년


카롤리네는 하노버 선제후의 후계자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투스와 1705년 결혼했고 다음해 임신했고 1707년 장남인 프리드리히를 낳습니다. 첫아이를 낳은 얼마후 카롤리네는 폐렴과 천연두를 심각하게 앓게 됩니다. 아이는 격리 당했지만 남편인 게오르그 아우구스투스는 아내곁을 떠나지 않았고 그역시 천연두에 감염되죠. 하지만 부부는 천연두를 이겨냅니다. 이처럼 부부는 매우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영위한듯 보였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평가됩니다.


하지만 당시는 현재와 달랐으며 군주에게 정부가 있는것은 당연한 관습처럼 여겨지던 시기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은 더욱더 가부장적이었기에 더했었죠. 아내를 사랑했었지만 게오르그 아우구스투스 역시 정부를 뒀었습니다. 카롤리네는 이런 남편의 정부들에 대해서 시어머니였던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와는 다른 방식을 취하게 됩니다. 그녀는 남편의 정부들에 대해서 잘 알았으며, 그들을 자신의 눈아래 두게 됩니다. 게오르그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에게 자신의 정부들 전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반면 카롤리네는 늘 남편에게 충실했었습니다. 이런 관계는 결국 당시 이상적인 "왕족 여성"의 상이었습니다. 남편의 정부들을 인내하면서 스스로는 남편에게 충실한 모습이었죠.



헨리에타 하워드

서퍽백작부인

헨리에타 하워드는 경제적 문제로 하노버로 가서 조지 2세의 정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캐롤라인은 상냥하고 별 야심없는 그녀를 남편의 정부로 인정해줬고 전통대로 자신의 시녀로 임명해으며, 서퍽 백작이 아내를 강제로 집으로 끌고가지 않고 궁정에 남아있을수 있게 서퍽 백작에게 일년에 1200파운드씩 연금까지 줬다고 합니다.


카롤리네의 시댁 식구들은 당시에 영국 왕위계승문제에 연결되어있었습니다. 카롤리네의 시할머니인 조피 선제후비는 왕위계승후보였지만, 영국의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왕위 계승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죠. 앤 여왕의 동생인 올드프리텐더가 살아있었고, 앤 여왕은 나이가 들면서 동생에게 좀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는 분위기가 됩니다. 이런 영향탓인지 앤 여왕은 살아있는 동안 하노버 가문 사람들이 영국에 오는것을 허락하지 않았죠. 이런상황에 대해 카롤리네는 라이프니츠에게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녀의 언니(블러디 메리)와의 관계에 앤여왕과 자신의 관계를 빗대어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714년 카롤리네의 시할머니이자 영국의 추정왕위계승자였던 조피 선제후비가 죽고, 몇주후 앤여왕이 죽으면서 카롤리네의 시아버지인 하노버의 선제후가 조지 1세로 즉위하게 되면서 카롤리네와 그녀의 가족들 역시 영국으로 가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독일식 이름보다 영국식 이름인 캐롤라인으로 알려지게되죠.


1714년 캐롤라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먼저 영국으로 갔으며 그 뒤에 캐롤라인이 두 딸을 데리고 영국으로 갑니다. 장남인 프리드리히는 하노버에 가정교사와 보모들과 함께 남겨졌는데, 아마도 이것은 하노버 선제후령에 가문의 남자들중 누군가는 있어야해서였을듯합니다. 캐롤라인의 시아버지는 벌써 50대였고 캐롤라인의 남편도 30대였기에 군주로써확고하게 인정받고 있던 하노버와 달리 불안정한 지위이며 더 강력한 지위였던 영국의 왕위를 안정시킬 필요성이 있었기에 둘이 함께 갔을듯합니다. 프리드리히는 아버지가 즉위할때까지 하노버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캐롤라인의 장남

프리드리히

후에 웨일즈공 프레드릭

1720년


영국으로 온 캐롤라인과 그녀의 남편은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전통적 칭호인 "웨일즈 공과 웨일즈 공비"가 됩니다. 이 칭호를 마지막으로 쓴 사람은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이었던 아라곤의 캐서린으로 그녀는 헨리8세의 형인 웨일즈공 아서와 결혼했었고, 아서가 죽은뒤 헨리8세와 재혼하면서 왕비가 되기전까지 이 칭호를 사용했었습니다. 웨일즈 공부부는 영국의 귀족들과 어울릴려고 노력했으며 이때문에 궁정은 두개의 파벌로 나뉘게 된다고 합니다.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정부 관리들과 독일에서 온 궁정 조신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며, 또 다른 무리들은 웨일즈공 부부를 중심으로 국왕의 총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이루던 무리였죠. 대중에게 더 인기있었던 사람들은 웨일즈공 부부를 중심으로 한 파벌이었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은 복잡한 영국 정치 상황과 부자간의 반복이 맞물려서 개인적으로 캐롤라인을 힘들게 했다는 것입니다. 캐롤라인의 남편은 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그것은 어머니인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때문이었죠. 조지 1세는 자신의 아내를 감금했고, 아이들을 절대 만나보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아들인 웨일즈공은 아버지의 이런 처사에 늘 불만이었고 이것은 늘 부자간에 긴장감을 만들었었죠. 게다가 정치적 문제마저 이런 상황으로 돌아가게 되면서 복잡하게 됩니다.



조지 1세


캐롤라인은 1717년 11월 조지 윌리엄을 낳았습니다. 그달에 아이의 세례식이 있었는데 아이의 아버지인 웨일즈공과 아이의 할아버지인 국왕이 아이의 이름과 대부모 문제로 다툼을 하게 됩니다. 그결과 웨일즈공은 체포되어서 가택연금당햇으며 궁정 조신이 웨일즈공과 만나는것이 금지되죠. 캐롤라인은 처음에는 아이들과 함께 있으려했지만, 남편이 연금당하자 남편 곁에 있기로 결정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와 떨어져 국왕이 돌보게 되죠. 하지만 캐롤라인은 아이들에 대한 걱정에 몸져누웠고 국왕 몰래 아이들을 만나러 갔었다고 합니다.   조지 1세가 며느리가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것은 못본척했다고도 이야기합니다. 그후에 국왕은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것을 허락햇다고 합니다.하지만 막내였던 조지 윌리엄이 태어난지 100일 정도간 된 1718년 2월 사망하면서 국왕과 웨일즈 공사이는 더욱더 악화됩니다. 왕자의 죽음은 병때문이었지만, 웨일즈 공부부는 어린 아기를 부모에게서 강제로 떼어놓아서 그렇다고 여겼으며 이에 대한 책임은 국왕에게 있다고 믿었죠. 



조지 윌리엄 왕자


캐롤라인은 로버트 월폴과 친분을 쌓았으며 그가 남편과 국왕사이를 중재하길 바랬다고 합니다. 아이들과 여전히 떨어져 지냈던 캐롤라인은 아이들과 함께 살길 바라고 있었죠. 하지만 이 중재는 그다지 성과가 없었으며 도리어 웨일즈공은 월폴이 권력을 노리고 이쪽과 저쪽을 오간다고 여기게 되죠. 결국 월폴과 그의 친구들이 입각하게 되자, 웨일즈공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었으며 이후 웨일즈공부부의 주변에는 정치가들 보다는 주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캐롤라인은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으며, 영국에 와서도 지식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세인트 제임스궁에 방대한 도서관을 마련했었죠. 또 18세기 유명한 철학 논쟁인 라이프니츠-클락크 서신 논쟁(Leibniz–Clarke correspondence)를 시작하게 만든 인물이 바로 캐롤라인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캐롤라인은 젊은 시절부터 라이프니츠와 친분이 있었으며 라이프니츠는 영국에 있던 캐롤라인에게 뉴턴의 연구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언급했고 이에 대해 뉴턴을 지지하던 철학자 사무엘 클락크가 라이프니츠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논쟁이 시작된것이었죠.

또 캐롤라인은 우두접종법을 지지했던 인물로도 알려져있습니다. 캐롤라인은 사형수들에게 처형대신 우두 접종법을 시행할 기회를 줬고 그들 모두가 살아남자, 다른 이들에게 다시 시행해봤으며 그들도 성공한뒤에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우두 접종법을 시행했다고 합니다. 왕가에서 아이들에게 우두 접종법을 시행하면서 이에 대한 나쁜 인식이 덜해진것은 물론이며 우두 접종법을 확산시키는 계기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에 대해 볼테르는 자신의 편지에서 캐롤라인에 대해서 극찬했었다고 합니다.



라이프니츠와 클라크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