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의 왕비들

영국의 왕비들...(18)안스바흐의 카롤리네 : 조지 2세의 왕비(세번째)

엘아라 2013. 10. 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영국의 왕비들...(18)안스바흐의 카롤리네 : 조지 2세의 왕비(세번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영국의 캐롤라인 왕비

조지 2세의 왕비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1 March 1683 – 20 November 1737)

1727년


캐롤라인의 시아버지였던 조지 1세는 1727년 사망했으며,그녀는 남편 조지 2세와 함께 1727년 10월 11일 대관식을 올렸고 이제 영국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캐롤라인은 정치적으로 남편인 조지 2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특히나 로버트 월폴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으며 그를 못마땅해하는 남편을 설득해서 월폴이 수상으로 남아있게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상 월폴과 휘그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기에 조지 2세가 크게 힘을 쓸수 없었던것도 있다고 합니다. 월폴과 왕비와의 정치적 관계는 매우 확고한 것이어서 한 궁정조신은 로버트 월폴에 대해 "왕비의 수상"이라고 부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로버트 월폴


캐롤라인은 살아있는 내내 월폴과 국왕 사이의 중재자로 정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녀는 국왕이 월폴의 정책을 따르도록 설득했으며, 월폴에게는 선동적 정책에 대항하도록 설득했다고 합니다. 또 캐롤라인은 멘토이자 시고모였던 프로이센의 조피 샤를로테 왕비의 정치적 견해를 받아들여서 스스로도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의회와 언론에 "자코바이츠"들이 자유롭게 연설하고 의견을 말할수 있도록 허락해줄 정도였죠.



캐롤라인 왕비


시간이 지나면서 캐롤라인과 조지 2세는 장남인 프레드릭문제로 골치아프게 됩니다. 프레드릭은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하노버에서 부모와 떨어져 성장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문제때문에 그럴수 밖에 없었는데 당시 어린 왕족들은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것이 일상이었기에, 이에 대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것으로 여겼던듯합니다. 하지만 1728년 영국으로 온 프레드릭은 가족과 어울리지 못했는데 특히 부모와 잘 지내지 못하게 되죠. 그는 정부들이 있었으며 빚도 지고 있었고 도박과 실없는 농담을 좋아하는 경박한 젊은이로 성장해있었죠. 게다가 그는 아버지의 정책에대해 공공연하게 반대의견을 냈으며, 자신은 조금의 권력도 없다는것에 불평하고 다녔습니다.  이런 문제는 조지 2세가 하노버로 갔을때 국왕의 부재중 섭정으로 웨일즈공인 프레드릭이 아닌 캐롤라인이 지목되면서 더욱더 심해졌을듯합니다. 1729년 조지 2세의 부재시에 영국은 여러가지 외교문제가 있었는데 캐롤라인이 섭정으로 있는 동안 이 문제가 어느정도 해결되게 됩니다. 포르투갈과의 갈등이 진정되었으며, 에스파냐와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기도 했었죠. 

하지만 1732년 국왕의 부재시에 있었던 여러 국내문제에 관여한것은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습니다.



동생들과 함께 연주중인 웨일즈공 프레드릭


왕비가 된 후에도 캐롤라인은 어린시절 배운대로 지식에 대한 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왕비 주변에는 수많은 예술가들이나 작가, 지식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캐롤라인은 많은 왕실 여성들처럼 보석 콜렉션이 있었는데 그녀는 특히 카메오나 보석에 인물을 각인한 것들을 수집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또 중요한 인물들의 인물화나 미니어쳐를 수집했으며 그림이나 조각등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캐롤라인은 잉글랜드 국왕과 여왕,왕비들의 흉상을 주문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1728년에는 윌리엄 3세 시절에 그려진 그림안에 감춰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한스 홀바인의 그림을 찾아내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캐롤라인 왕비

1730년경


캐롤라인은 떨어져 지낸 장남과는 사이가 소원했지만, 다른 자녀들과는 잘 지낸듯합니다. 특히 위의 세딸들과는 사이가 좋았던것같은데 큰딸인 프린세스 로열 앤이 오라녜공에게 시집갔을때 매우 우울해했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