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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국왕 양위 특집]벨기에 왕가의 여성들...(13) 마리 조제 : 알베르 1세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3. 7.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나눌려고 나눈것은 아니고 글쓰다보니 내용이 많아서..라고 우겨보렵니다.-0-;;;;;


[벨기에 국왕 양위 특집]벨기에 왕가의 여성들...(13) 마리 조제 : 알베르 1세의 딸(두번째)



벨기에의 마리 조제

이탈리아의 마리아 조제 왕비

Marie José of Belgium 

(Marie José Charlotte Sophie Amélie Henriette Gabrielle)

(4 August 1906 – 27 January 2001)

사진출처 : http://belgieroyalist.blogspot.kr/2010/11/children-of-king-albert-ier.html



나폴리로 옮겨간 마리 조제는 나폴리 사람들에게 매우 환영받습니다. 아무래도 마리 조제가 양시칠리의 마지막 왕비인 마리 조피의 조카 손녀라는 이유도 어느 정도 포함되었을듯합니다. 이런 대중의 환영은 남편과의 사이도 좋게 했는데 둘사이에는 모두 네 자녀가 태어나는데 이 네아이 모두 나폴리에 살때 태어난 아이들이라고 합니다.  마리 조제는 아이들을 잘 교육시켰지만, 자기 뜻대로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낼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전통적 교육방식대로 가정교사에게 교육받게 됩니다.



아들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와 함께 있는 마리 조제


하지만 나폴리에 있던 시기에 마리 조제는 역시 가족들의 죽음을 겪게 되죠.  1934년 아버지 알베르 1세가 등반사고로 사망합니다. 이때 마리 조제는 첫아이를 임신중이었는데, 사람들은 마리 조제와 아이가 잘못될까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했었다고 합니다. 또 아버지가 죽은 다음해인 1935년에는 올케였던 아스트리드 왕비가 자동차사고로 사망하기도 합니다. 


마리 조제가 이탈리아에서 살던 시기 이탈리아 왕가는 무솔리니와 매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리 조제는 무솔리니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하죠. 무솔리니와 관계된 몇몇 사람들은 마리 조제가 무솔리니를 유혹했다거나 그와 연애관계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무솔리니 가족들의 시선에서 본것으로 일반적 견해와 차이가 있습니다. 대부분 들었다는 이야기이며 자신의 시선으로 해석한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마리 조제는 적십자사 회장이 된후 적십자사 활동에 열을 올렸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국왕과 함께 무솔리니를 만난 자리에서 적십자사 활동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때 마리 조제는 병상에 대한 열악한 환경을 설명했었는데, 훗날 무솔리니의 정부는 이에 대해서 마리 조제가 무솔리니를 유혹했으며 무솔리니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 조제의 자유주의적 성향이나 무솔리니의 반대파에 대한 호의 등으로 미뤄봐서 무솔리니와 마리 조제의 관계에 대해서 "연애관계"라는것은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는 이야기인듯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나도는 이유는 당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진 남자였으며 마리-조제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유명한 여성이었기에 둘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것이 아닐까라고 상상한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죠.



무솔리니와 마리 조제

1935년


2차대전이 일어나자 마리 조제는 남편과 함께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 마리 조제는 벨기에가 침략당하자 어머니와 함께 머물길 원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과 이탈리아 대중들은 그녀가 이탈리아에 머물길 원했죠. 마리 조제는 독일과 동맹을 맺은 이탈리아의 왕족으로 히틀러와도 만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전쟁기간동안 마리 조제는 당시 이탈리아 내각 관료들과 친분이 있었으며, 벨기에 국왕의 여동생이었기에 독일/이탈리아와 다른 서유럽 국가간에 몇안되는 외교채널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에 머무르던 영국 외교관은 당시 마리 조제에 대해  괜찮은 정치적 판단을 내릴수 있는 유일한 이탈리아 왕가 사람이라고 평가할 정도였습니다.


1943년 미군이 시칠리에 상륙하고 로마에 폭격이 시작되면서 이탈리아 상황은 반전됩니다. 1943년 7월 무솔리니는 실각했으며,이탈리아 정부는 이제 독일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연합군에 합류하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도리어 큰 혼란을 가져왔었죠. 마리 조제는 국왕이나 남편과 관계없이 바티칸의 외교관을 통해 미군과 교섭을 시도했다고 합니다. 마리 조제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은 몬시뇰 지오바니 바티스타 몬티니로 그는 후에 교황 바울 6세가 됩니다. 하지만 이 교섭은 실패했으며,마리 조제는 아이들과 함께 피에르몬트로 떠나야했으며 이후에는 스위스로 떠나야만했습니다. 이때 독일정부는 마리 조제를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미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마리 조제는 이탈리아로 돌아갑니다. 그녀의 시아버지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퇴위하라는 압력에도 퇴위를 거부했으며, 마리 조제의 남편인 움베르토가 섭정으로 아버지를 대신하고 있었었죠. 결국 1946년 5월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3세는 퇴위했고,마리 조제의 남편인 움베르토가 국왕이 됩니다. 마리 조제 역시 이탈리아의 왕비가 되죠. 하지만 다음달 치뤄진 투표에서 이탈리아는 왕정을 폐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때문에 마리 조제는 "메이 퀸(오월의 왕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왕비가 된지 한달 만에 마리 조제는 남편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야했죠.



움베르토 1944년


마리 조제와 가족들은 처음에 포르투갈에서 살았습니다만, 마리 조제와 움베르토는 별거하기로 합의를 합니다. 둘은 맞지 않았으며 망명중의 여러가지 힘든 상황은 이런 둘 사이를 멀어지게 할 뿐이었죠. 하지만 둘은 이혼은 하지 않았는데 둘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을뿐만 아니라, 움베르토는 언젠가 이탈리아로 다시 돌아가길 바랬는데 이때 가톨릭 국왕으로써 이혼은 큰 오점이 될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리 조제는 네아이들과 함께 스위스으로 가서 살았습니다. 


마리 조제는 후에 딸인 마리-베아트리체와 함께 멕시코에서 잠시 살기도 했었으며, 남편이 죽은뒤에 이탈리아에도 갈수 있었죠. 마리 조제는 2000년 폐암으로 제네바에서 사망했습니다.



마리 조제



자료출처

위키 피이더

그림출처

1.http://belgieroyalist.blogspot.kr/2010/11/children-of-king-albert-ier.html

2.위키 피디어

3.이탈리아어 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