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4)마리아 크리스티나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엘아라 2013. 7. 2.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중 성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죽은 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까 고민중입니다.

다섯명이던가인데 유아때 죽은 셋과 나머지 둘에 대해서 나눠서 쓸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다섯명을 한꺼번에 넣을까 싶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쿨하게 안적을까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다보나 자료가 많긴 하네요.-0-;;;


이번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예뻐한 딸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에 대해서 해볼까합니다.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4)마리아 크리스티나 :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테센의 여공작

Maria Christina, Duchess of Teschen 

(Maria Christina Johanna Josepha Antonia)

(13 May 1742 – 24 June 1798),


마리아 크리스티나 요한나 요제파 안토니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그의 부인인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위로 세명의 언니와 오빠 한명이 있었지만, 그중 언니 마리아 안나와 오빠인 요제프만이 성인으로 성장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차녀였습니다.

"미미"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사랑한 자녀였다고 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와 생일이 같았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애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형제 자매들이 그녀를 심하게 질투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부모

로렌의 프란스 슈테판(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헝가리,보헤미아의 여왕)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은 아름다웠을뿐만 아니라 매우 지적이었으며 부모의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아는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그녀에게 후에 올케가 되는 파르마의 이사벨라역시 빠져들게 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었는데 어머니의 편애를 이용해서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 훨씬더 많은 것을 얻어냈을뿐만 아니라,형제 자매들에게 거만하게 대하는등의 일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어린시절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길 원하게 됩니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작센의 알베르트 카시미르였습니다. 그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아우구스투스 3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이었던 마리아 요제파 여대공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위로는 형들이 줄줄이 있었으며 물려받을 재산도 변변치 않은 인물이었죠.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테판은 딸을 이런 가난뱅이 보잘것 없는 왕족에게 시집보내는것을 원치 않았으며, 합스부르크가문의 전통대로 정략결혼을 원하게 됩니다. 프란츠 슈테판이 원한 사위감은 조카였던 사보이의 베네토였습니다. 그는 사르데냐 국왕의 아들이자 프란츠 슈테판의 누이였던 로렌의 엘리자베스 테레즈의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프란츠 슈테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남편을 잃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너무나 사랑하는 딸마저 잃는것을 바라지 않았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알베르트와 결혼한다면 그와 함께 어머니 곁에 있을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작센의 알베르트 카시미르

테센 공작

그는 작센 선제후(이자 폴란드 국왕)의 아들이었지만 상속권이 멀었기에 무일푼이나 다름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사랑은 결국 그에게 엄청난 재산과 지위를 가져다 주게 됩니다.


결국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작센의 알베르트와 결혼했으며,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을 위해 엄청난 혼수는 물론 사위에게 막대한 지위를 부여해줍니다. 그에게 헝가리 총독직을 부여해줬으며 딸 부부에게 테센 공작령을 줬을 정도였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작센의 알베르트 사이에서는 아이는 없었지만 부부는 매우 행복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런 편애는 훗날 형제 자매들, 특히 자매들의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동생이었던 마리아 아말리아는 언니처럼 재산도 없었던 가난한 공작인 팔츠-츠바이브뤽켄-비르켄펠트의 카를 아우구스투스를 사랑했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가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처럼 자신의 결혼도 허락해주길 바랬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아 아말리아를 파르마 공작과 결혼시키려했고, 그녀의 오빠였던 요제프 2세 역시 이 계획에 찬성하는 바람에 결국 마리아 아말리아는 파르마 공작고 결혼해야만했었죠. 



마리아 아말리아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여동생, 파르마 공작부인


결국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부르봉가문으로 시집간 자매들인 마리아 아말리아.마리아 카롤리나,마리아 안토니아와 친하지 못했는데 세자매들은 서로에게 편지와 옷 보석등을 주고 받았던 반면, 마리아 크리스티나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편지를 주고 받긴했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고 언니 부부가 프랑스에 왔을때도 그냥 공식 초대 손님으로만 대했을뿐.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원했음에도 왕비의 사적공간이었던 쁘티 트리아농에는 초대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또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동생이자 후에 황제가 되는 레오폴트 역시 누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를 믿고 동생들에게 신랄한 말과 행동을 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가 죽을때까지 어머니 곁에서 살았으며 어머니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딸이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녀의 남편인 알베르트는 1780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 됩니다. 그녀의 숙부이자 이모부였던 로렌의 카를 알렉산더가 그해 사망했기에 다른 총독이 필요했었던것이죠.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알베르트는 1781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로 갔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알베르트는 권력을 가진 자리에 있긴 했지만 실권이 없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오빠였던 요제프 2세는 동생 부부가 단지 상징적 존재로만 남아있길 바랬었으며 실질적 통치는 요제프가 임명한 주변 인물들의 뜻에 따르길 바랬다고 합니다. 이때 부부는 수많은 예술작품을 모았다고 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여대공

테센 여공작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뒤,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는 프랑스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그녀의 남편과 양아들인 카를 대공은 프랑스에 맞서 싸웠지만 결국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프랑스에 내줘야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그 남편은 1793년 빈으로 돌아왔으며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빈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작센의 알베르트 사이에서는 딸이 한명 태어났지만 태어난 다음날 사망합니다. 그뒤로 둘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지 않았죠. 이에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동생 레오폴트의 아들이었던 칼 대공을 입양합니다. 레오폴트는 자녀가 없는 누나 부부에게 셋째아들을 양자로 보냈죠. 아마 이런 가장 큰 이유는 장남인 프란츠는 언젠가 황제가 될것이었고, 차남인 페르디난트는 투스카니를 물려받을 예정이었지만 삼남부터는 물려받을 영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을듯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는 테센 공작령이 있었고 카를 대공은 양자로써 이 테센 공작령을 물려받았으며 이후 오스트리아-테센 분가를 형성하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

레오폴트 2세의 아들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양자

테센 공작

그는 고모부부의 양자로 고모 부부와 함께 지냈는데, 프랑스 혁명전쟁이 시작되고 프랑스가 합스부르크령 네덜란드를 공격하자 양아버지인 테센 공작과 함께 전투에 나갔습니다. 이후 그는 혁명전쟁중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제일 유능한 장군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