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6) 요안나 :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엘아라 2012. 11. 13.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페르디난트 1세의 딸들을 끝냈습니다만....

이제 페르디난트 1세 손녀들 이야기를 할차례군요-0-;;

그나마 합스부르크가문 분가들이 오래 못간것이 다행이랄까--;;그렇습니다만...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오스트리아-에스테 나 오스트리아-헝가리 분가들은 팔팔하게 남아있어서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이 되긴 합니다만..아마 거기까지 갈려면 6개월은 걸릴테니 그건 그때 생각하죠.-0-;;;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6) 요안나 : 페르디난트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요안나 여대공

토스카나의 조반나 대공비

Joanna of Austria 

(German Johanna von Österreich, Italian Giovanna d'Austria

(24 January 1547 – 11 April 1578)


요안나는 페르디난트 1세와 그의 부인인 안나 야겔로니카의 막내딸이자 막내아이로 태어났습니다. 요안나의 어머니인 안나는 요안나를 낳은 이틀후에 사망했습니다. 또 요안나의 큰언니였던 엘리자베트는 요안나가 태어나기 2년전 사망하기도 했었습니다.


요안나는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음악과 철학들을 배웠으며, 프랑스어,에스파냐어,이탈리아어.헝가리어,라틴어등을 배웠다고 합니다. 아마도 요안나는 주로 예술과 언어쪽으로 관심이 많았을듯합니다만 이것은 훗날 결혼해서 남편과의 취향이 다른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탈리아어 위키와 독일어 위키가 평가가 다르군요..--;;;독일어 위키에는 나름 많이 배웠다고 나와있지만 이탈리아어 위키에는 그다지 똑똑하지는 않았다고 나오는....-0-;;)



요안나


요안나의 언니들인 카타리나와 엘레오노르, 바르바라는 모두 이탈리아 가문으로 시집을 갔었습니다. 그만큼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이탈리아는 중요한 곳이었죠. 요안나 역시 이탈리아의 가문으로 시집가기로 결정됩니다. 요안나의 남편이 되는 사람은 토스카나의 프란체스코로 바로 메디치 가문 사람이었죠. 프란체스코의 아버지인 코지모 1세로 몰락해가던 메디치가문을 중흥시킨 인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의 어머니인 엘레노오라 디 톨레도는 에스파냐 고위 귀족출신으로 그녀는 아름다웠으며 지참금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난것은 코지모 1세와 원래 혼담이 오갔던 사람은 엘레오노라가 아니라 언니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엘레오노라가 더 예쁜다는것을 알게 된 코지모 1세가 과감하게 지참금을 낮춰서 엘레오노라와 결혼했다고 하더라구요-0-)


요안나는 1565년 피렌체에서 프란체스코와 결혼합니다. 요안나는 시아버지인 코지모 1세에게는 매우 환영받는 존재였는데 그는 특별히 합스부르크가문과의 유대를 강화하는데 며느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것을 알았죠. 그는 며느리를 위해 특별히 집을 장식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요안나의 남편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데치


하지만 요안나는 이탈리아에서 매우 불행했습니다. 그녀는 향수병을 앓았고, 피렌체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지 못했었습니다. 게다가 남편과의 사이도 안 좋았는데 둘은 성격이 매우 달랐다고 합니다. 요안나는 합스부르크가문 출신으로 메디치가문보다는 훨씬더 "고귀한 가문"출신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을 푸대접하는 남편에 대해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반면 요안나의 남편인 프란체스코 역시 요안나를 그다지 탐탁치 않아했는데 그녀가 너무 거만하다고 여겼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둘의 성격도 달랐는데 요안나가 침울한 성격이었던 반면 프란체스코는 활달한 성격이었고 그는 아내가 관심이 없었던 여러가지에 관심을 보이는 등 취미도 별로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요안나

토스카나의 대공비

...이 리얼한 주걱턱이라니..ㅠ.ㅠ


게다가 토스카나 궁정에서 요안나의 입지가 점점 약해졌는데 첫번째는 요안나가 후계자를 낳지 못했었기 때문이죠. 결혼후 10년간 요안나는 여섯명의 딸을 낳았습니다. 남성후계자를 낳아야하는 의무가 있던 그녀에게 이것은 치명적이었으며 게다가 아이들도 두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아기때 사망해서 더 타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은 전 유럽이 알도록 바람을 피웠는데 바로 유명한 "비앙카 카펠로"와 사랑에 빠진것이었습니다. 비록 요안나 입장에서는 매우 부당한 일이었지만, 전 유럽 궁정에서는 프란체스코와 비앙카 카펠로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으며 이것은 요안나에게 유리하지 못한 것이었죠. 그리고 비앙카는 요안나보다 먼저 아들을 낳기도 하죠. (이 아들이 안토니오 데 메디치로, 출생에 대해서 말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있는 비앙카 카펠로

(토스카나 대공비가 된후)


하지만 비앙카가 아들을 낳은 다음해인 1577년 요안나도 아들을 낳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의 사촌이자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필리포라고 세례받게 되죠. 아들을 낳은후 요안나의 입지는 매우 공고해지게 됩니다. 궁정 사람들 모두가 비앙카 카펠로의 아들이 토스카나 대공위를 물려받게 될까봐 걱정했었는데 요안나가 아들을 낳으므로써 이 걱정이 해소되었기 때문이죠.



아들 필리포와 함께 있는 요안나



아들을 낳은 다음해에 요안나는 또 임신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의 만삭에 가까웠던 1678년 4월에 요안나는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으며 임신하고 있던 아들은 사산되었고 그 다음날 요안나 역시 사망합니다. 

요안나가 죽은지 두달후에 프란체스코는 비앙카 카펠로와 재혼합니다. 이때문에 궁정의 많은 사람들이 프란체스코와 비앙카가 결혼하기 위해서 요안나를 죽였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는 소문이었을뿐 요안나 상태로 봤을때 아이를 낳다 사망했다고 합니다.



요안나

미화버전-0-;;;



요안나의 자녀들중 성인으로 성장해서 결혼한 자녀는 두명의 딸밖에 없습니다. 큰딸인 엘레오노라는 사촌인 만토바 공작과 결혼했었습니다. 엘레오노라의 딸들중 엘레오노라 곤자가는 후에 황제 페르디난트 2세의 두번째 부인이 됩니다. 둘째딸인 마리아는 프랑스의 앙리 4세와 결혼해서 프랑스 왕비이자 루이 13세의 모후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