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막시빌리안 2세의 둘째딸인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왕비가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합스부르크가문 출신으로 프랑스 왕비가 된사람들이 좀 있긴하네요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18)엘리자베트 : 막시밀리안 2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프랑스의 왕비
Elisabeth of Austria
(5 July 1554 – 22 January 1592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는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그의 부인인 에스파냐의 마리아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그녀는 언니인 안나와 동생인 마티아스와 함께 교육받았습니다.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는 딸들을 무척이나 예뻐한 사람으로 엘리자베트 역시 안나처럼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어린시절부터 매우 예쁘고 총명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엘리자베트의 부모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인판타 마리아
엘리자베트는 백옥같은 흰 피부에 긴 금발머리에 완벽한 체형을 갖춘 미인으로 16세기 가장 아름다웠던 공주중 한명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게다가 매우 다정하고 자비심 많은 성품에 외부로부터 철저히 보호받는 교육을 받아서 세상의 많은 일들(주로 연애질)에 대해서 거의 모르는 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황제의 딸이었으며 이런 완벽한 외모와 성품을 가지고 있던 엘리자베트에게 많은 유럽 가문이 관심을 가진것은 당연한 일이었을듯합니다. 또 엘리자베트는 지적호기심도 많았지만, 신앙심 역시 매우 깊었습니다. 엘리자베트의 어머니인 마리아는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딸들에게도 이런 신앙심을 물려주게 됩니다. 이때문에 엘리자베트는 어린시절부터 자신의 롤모델로 "헝가리의 성 엘리자베트"를 모델로 삼았다고 합니다. (성 엘리자베트는 헝가리 공주이자 튀링겐의 란트그라린으로 헤센 가문의 선조가 되는 사람입니다.)
1559년 프랑스는 샤를(후에 샤를 9세)의 신부감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합스부르크가문쪽에도 눈을 돌렸죠. 아마도 엘리자베트가 아니라 샤를과 비슷한 연령대였던 엘리자베트의 언니인 안나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만 안나는 이미 에스파냐쪽과 혼담이 진행되고 있었죠. 이때문에 프랑스는 안나의 동생인 엘리자베트에게 관심을 보였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도 프랑스쪽에서 지속적으로 엘리자베트에 대해서 관심을 보였습니다만, 혼담이 성사되지는 않을듯 보였습니다.
네 자녀와 함께 있는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
이후 엘리자베트에게는 다른 혼담이 들어옵니다. 덴마크의 국왕이었던 프레데릭 2세나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세바스티앙 과의 혼담이었죠. 하지만 이 두 혼담 모두 성사되지 않습니다. 1569년 샤를9세의 모후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는 며느리감으로 다시 합스부르크쪽 사람을 원하게 됩니다. 카트린느가 원했던 사람은 엘리자베트의 언니였던 안나였지만 안나는 이미 외삼촌과 결혼하기로 결정되었었죠. 결국 협상끝에 엘리자베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기로 결정됩니다.
1570년 대리혼을 치룬후 엘리자베트는 프랑스로 가게 됩니다. 여기 재미난 이야기가 있는데 엘리자베트를 맞이한 사람은 국왕의 동생인 앙주 공작 앙리였습니다. 그런데 샤를 9세는 자신의 아내될 사람을 미리 보기 위해 호위병사로 변장한뒤 동생과 함께 엘리자베트를 보러 갔었습니다. 그리고 앙리와 엘리자베트가 정원을 거닐면서 산책하는 동안 자신의 아내를 보게 되죠. 매우 아름다웠던 그녀를 보고서는 좋아했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샤를 9세
엘리자베트의 남편
엘리자베트의 남편인 샤를 9세는 아내의 아름다움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미 정부였던 마리 투셰를 더 사랑했었습니다. 엘리자베트와 샤를 9세는 전형적인 정략결혼한 부부로 비록 둘은 사랑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잘 다독이는 사이가 됩니다. 특히 엘리자베트가 프랑스 궁정의 방종한 삶에 충격받았다는 것을 알게된 샤를 9세는 비록 자신도 정부가 있었지만, 엘리자베트가 이런 궁정생활에 노출되는것을 막아줬다고 합니다. (..마누라 몰래 바람피는거?) 엘리자베트는 독일어,라틴어,스페인어,이탈리아어를 했지만 프랑스어는 잘 하지 못했고 이때문에 프랑스 궁정에서 좀 소외당했었고 친구를 많이 만들수 없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의 몇 안되는 친구중 하나가 바로 시누이였던 마르가리트 드 발루아(마고)였습니다.재미난것은 마고와 엘리자베트는 매우 친한 사이였지만, 엘리자베트는 마고의 "방종함"을 따르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궁정의 방종함에 충격을 받았고 스스로 궁정에서 떨어져 바느질과 독서와 자선사업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또 엘리자베트는 신실한 가톨릭 교도로 신교도들을 멀리했으며 신교도 궁정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성 바르톨로뮤 축일의 학살이 일어났을때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는 학살소식에 외국인 신교도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도록 했었습니다. 또 학살이 일어난 다음날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고 그가 계획했다는것을 알자 남편의 영혼을 긍율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겠다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엘리자베트
프랑스 왕비
엘리자베트는 1572년 10월 첫아이인 마리 엘리자베트를 낳습니다. 아이의 이름은 외할머니인 마리아 황후와 대모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의이름을 딴것이었죠. 하지만 이후 엘리자베트의 남편인 샤를 9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늘 남편이 건강해지길 기도하고 남편곁을 말없이 지켰습니다만 결국 샤를 9세는 1574년 사망합니다.
엘리자베트와 샤를 9세의 딸
마리 엘리자베트 드 발루아
엘리자베트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는 사위가 죽자 딸을 샤를 9세의 동생이자 새로 프랑스의 국왕이 된 앙리 3세와 결혼시키려 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이 혼담을 거부했고 이후 막시밀리안 2세는 딸에게 빈으로 돌아오라고 하죠. 결국 엘리자베트는 1575년 딸 마리 엘리자베트를 프랑스에 남겨두고 빈으로 돌아갑니다. (마리 엘리자베트는 할머니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손에 양육되었지만 여섯살때 사망했습니다.)
엘리자베트
참고로 이건 상복이 아닙니다.
프랑스 왕비들은 전통적으로 "흰옷"을 상복으로 입는다고 합니다.
엘리자베트는 빈에서 어린시절 살던 집에서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과 오빠의 즉위를 봤으며, 멀리서 어린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들어야했죠. 언니인 안나도 그녀보다 미리 사망했었습니다. 안나가 죽자 합스부르크가에서는 엘리자베트를 펠리페 2세와 결혼시키려고 시도했었습니다만 엘리자베트는 "프랑스 왕비는 다시 결혼하지 않소"라고 말하면서 결혼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원래 필리프 6세의 아내였던 나바라의 블랑쉬가 한말이었다고 합니다.)
이후 엘리자베트는 수녀원을 설립했고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엘리자베트는 시누이였던 마고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면서 살았습니다. 또 여러권의 책을 쓰거나 번역하기도 했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후의 엘리자베트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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