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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와르의 투쟁 : 프라탑 싱

엘아라 2012. 9. 1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제가 메와르 역사를 다 본것이 아니라 그냥 칫토르가르 이야기 잠깐 보고 쓰기 시작한거라 저도 글쓰면서 자료들을 읽고 있거든요.그래서 글 제목이 좀 이상하게 지었더라구요.

뭐 대충 보세요-0-;; (이런 무책임한.._)


이 글을 쓰게된 의도가 사실 메와르가 무굴제국과 그렇게나 쌈질을 했는데 왜 영국의 지배 체제는 순응했는가 궁금했거든요.--;;; 하여튼 지금 자료들을 읽고 있는데 어째 전부 무굴제국이랑 쌈질한 이야기밖에 없네요..ㅎㅎㅎㅎ


메와르의 투쟁 : 프라탑 싱

우다이 싱(우다이 2세)가 우다이푸르로 수도를 천도하고 무굴제국과의 결혼동맹을 수용한것은 굴복하지 않는것으로 유명한 메와르 귀족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특히 무굴제국을 "외국인(터키)"로 여겼기에 카스트도 맞지 않았다. 다시 말해서 정결치 못한 외국인의 피가 왕가에 들어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우다이 싱은 죽을때까지 메와르를 통치했다. 귀족들은 아마도 우다이 싱의 아들이자 강경파였던 프라탑 싱이 왕위계승을 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을듯하다.

우다이 싱은 죽어가면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 자그말(Jagmal)이 왕위를 이어받길 바랬다. 하지만 메와르의 귀족들은 자그말이 아닌 우다이 싱의 장남 프라탑 싱이 왕위를 계승하길 바랬다. 그리고 1568년 우다이 싱이 죽자 메와르에서는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한다. 전설에 따르면 프라탑 싱은 아버지의 뜻을 따르길 바랬지만 귀족들은 난세에 허약한 국왕이 들어서길 원치 않는다면서 장남인 프라탑 싱이 왕위를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프라탑 싱이 이를 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상 메와르 왕위를 위한 권력투쟁이 일어났을것이며 자그말은 패배했던것이다. 즉위식날 자그말은 왕궁에서 축출당했으며 프라탑 싱이 메와르의 국왕이 되었다.

라나 프라탑 싱

그는 라지푸트족 최고의 전사이자 "기사도"를 아는 인물로 묘사됩니다.

만 싱을 암살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거부했으며 무굴제국의 귀족여성들을 붙잡았을땐 호위까지 붙여서 여성들을 돌려보냈다고 전해집니다.-0-;;



훗날 라지푸트 족 최고의 전사로 추앙 받게 되는 프라탑 싱은 원대한 꿈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그는 칫토르를 회복해서 무굴제국과도 겨룰정도였던 메와르의 옛 영광을 찾겠다는 것이었다. 훗날 프라탑 싱은 자신과 할아버지 사이에 아버지가 없었다면 무굴제국을 몰아냈을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전해질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즉위한 초기 무굴제국과의 충돌을 바로 원한것이 아니었다. 악바르 대제 역시 메와르와의 충돌을 피하길 원했고 프라탑 싱 역시 이제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무굴제국과의 정면충돌을 어느정도 피하고 싶었을것이었다. 이런 의도의 증거로 둘은 서로의 궁정에 외교사절을 파견해서 일단 외교적 협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했었다. 하지만 결국 "지역 패권이 달린"문제는 외교적 협상으로 결정될수는 없었다. 

악바르와 프라탑이 서로에게 등을 돌리게 되는 원인은 결국 갠지즈강 유역의 패자로써의 지위때문이었다. 프라탑은 무굴제국의 봉신이 아닌 독립된 왕국의 국왕지위를 원했는데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었다. 다른 라지푸트 족의 수장들이 대부분 무굴제국의 봉신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그렇게 라자스탄지방을 평정했던것을 생각하면 메와르를 독립 왕국으로 둔다는것은 결국 다른 라지푸트족 수장들도 똑같은 요구를 하게 되어서 무굴제국의 정치적 군사적 불안정을 가져올수 있는 문제였다. 
반면 프라탑은 다른 라지푸트 수장들처럼 무굴제국의 봉신 지위(심지어 프라탐 싱의 동생들도 무굴제국의 봉신으로 무굴제국에서 일하고 있었다.)를 받아들인다는것은 자신을 지지하는 메와르의 귀족세력과 그 영향력있는 부족들의 반감을 사는것으로 결국 정치적 자살행위나 다름 없는것이었다.

결국 이런 이유로 둘의 외교 협상은 결렬되었고 무굴제국과 메와르는 다시금 부딪히게 된다. 

악바르 대제



1576년 6월 라자스탄 지방의 할디가티( Haldighati)에서 무굴제국의 군대와 메와르의 군대는 맞닥들이게 된다. 모든 기록에서 무굴제국의 병사들이 메와르의 군대들보다 압도적인 숫자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굴제국의 총사령관은 악바르 대제의 총애를 받던 사령관이자 후에 자이푸르의 마하라자가 되는 만 싱이었다. 반면 메와르는 프라탑 싱과 그 휘하 장군들이 모두 나왔다.
전투는 매우 치열했으며 양측 병사들 시신이 산더미처럼 쌓였고 피가 호수를 이룰정도라고 했다. (이 지역의 이름은 피의 호수라는 의미로 Rakt-Talai라고 불린다고 한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라탑 싱을 패배하게 된다. 장군들은 프라탑 싱을 피신시키기로 하는데 대역을 내세웠다고 한다. 이 젊은 장교는 프라탑 싱을 대신해서 전장을 지켰으며 전장에서 살해당했다. 

라나 만 싱

자이푸르의 마하라자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기억하기로는 그는 무굴제국에 투신한후 라자스탄지방의 전투에서 늘 선두에 섰대나 어쩐대나..그랬던 기억이 나네요-0-;;;;



하지만 치열한 전투는 프라탑 싱을 "최고의 전사"라는 칭호를 인식시켜주는 여러가지 전설을 낳게 된다. 라자스탄 지방에서는 이 전투때 프라탑 싱에 대한 전설이나 노래가 현재도 전해지고 있다. 특히 그의 말인 체탁(푸른말이라는 뜻인듯합니다. 체탁에 대한 노래를 영어로 번역한것을 보면 푸른말 어쩌고그러거든요.)에 대한 일화는 굉장히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프라탑 싱이 전장에서 만 싱의 코끼리를 만나게 된다 체탁은 코끼리의 몸통에 자신의 앞발을 얹져 주인이 공격하기 좋게 만들었으며 프라탑 싱은 이 기회를 노려 만 싱에게 창을 던졌는데 만 싱은 몸을 굴려 간신히 피했지만 코끼리 몰이는 사망했다. 하지만 이때 체탁은 칼에 맞아서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 명마는 주인을 태우고 피를 흘리면서 전장에서 수km까지 되는곳으로 달려갔고 작은 개울을 넘은 직후 쓰러져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체탁이 죽은 장소라고 알려진 곳에는 현재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Statue of Maharana Pratap of Mewar, commemorating the Battle of Haldighati, City Palace, Udaipur

우다이푸르에 있는 체탁을 타고 있는 프라탑 싱의 조각상

....나 우다이푸르 갔다왔는데 ..왜 이런건 하나도 못봤지..ㅠ.ㅠ

진짜 외국은 관광을 가야한다는..ㅠ.ㅠ



비록 무굴제국은 프라탑 싱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지만 메와르를 완전히 장악할수 없었다.
무굴제국과의 정면 충돌에서 패배한 프라탑 싱은 밀림지대로 들어가서 전투를 지속했다. 그의 전투 방식은 "게릴라 전"으로 주로 성밖에 있는 부대들을 기습공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그가 집중적으로 공격한 목표중 하나가 무굴제국의 봉신으로 들어간 사람들의 부대였다. 프라탑 싱은 수도 우다이푸르가 아닌 밀림 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했고 스스로 무굴제국을 몰아내고 자신의 왕국(특히 칫토르)를 되찾을때까지 왕궁에서 머물지도 않을것이며 편안한 침상에서 지내지 않을것이라고 맹세했다고 전해진다. (...== 와신상담이냐-0-;;)

프라탑 싱이 이렇게 무굴제국에 대적할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메와르의 주된 부족들 모두가 무굴제국과의 화평을 거부하고 전투를 지지했기 때문에었다. 많은 부족들이 프라탑 싱을 지지해서 그에게 경제적인적자원을 지원했고 이것으로 프라탑 싱은 무굴제국에 대한 전투를 지속할수 있었던 것이다. (훗날 프라탑 싱의 아들인 아마르 싱이 평화조약을 맺자 이런 부족들중 가장 강경했던 일부부족들은 아예 나라를 떠나 다른곳으로 가버릴 정도였다.)

프라탑 싱은 57살의 나이로 사냥에서 다친 상처가 악화되어서 사망하게 된다. 그는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아마르 싱에게 "평생 무굴제국과 대적하는것을 그만두지 않겠다"라고 맹세하게 했다. 

사냥중인 프라탑 싱



프라탑 싱의 아들이었던 아마르 싱은 아버지 곁에서 늘 전투를 했다. 그리고 아버지의 원대한 꿈도 알았다. 그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무굴제국과의 투쟁을 지속하게 된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