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역시 역사는 제대로 알아야한다는..ㅠ.ㅠ
루돌프 1세때문에 머리 깨지게 고민했는데 "황제로 봐야한다"라고 이야기해주시는군요.
앞으로 글쓸때 이점을 염두에 둬야겠습니다.
대관은 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형식적인 면을 모두 충족했다고 볼수 있으니 황제라 할수 있겠죠
이번에는 마리 드 부르고뉴와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입니다. 그런데 참 삶이 파란만창했군요.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3) 마르가레테 : 막시밀리안 1세의 딸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아스투리아스 공비
사보이 공작부인
네덜란드 총독
Margaret of Austria
(10 January 1480 – 1 December 1530)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는 1480년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과 그의 첫번째 부인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상속녀였던 마리 드 부르고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르가레테라는 이름은 마리 드 부르고뉴의 새어머니였던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의 이름을 따서 지은것이라고 합니다. 마리 드 부르고뉴는 이 새어머니를 무척 믿고 의지했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가 2살이 되던 1482년 어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는 말을 타다가 사고로 사망합니다.
마르가레테의 부모
막시밀리안 1세와 그의 부인인 마리 드 부르고뉴
마르가레테는 어머니가 죽은뒤에 혼담이 결정됩니다. 다른 많은 경우들처럼 그녀도 정치적인 이유로 결혼이 결정되죠. 1482년 막시밀리안은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11세와 조약을 맺습니다. 여기서 막시밀리안은 딸 마르가레테를 루이 11세의 후계자인 샤를와 결혼시키기로 하죠. 이 결혼에서 마르가레테는 프랑슈-콩테 지방을 지참금으로 가지고 가기로 되어있었습니다. 1년후인 1483년 약혼식이 열렸으며, 중세식 전통대로 루이 11세가 마르가레테의 후견인이 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집을 떠나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받게 됩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는 마르가레테의 나이가 겨우 세살이었기 때문이죠. 물론 결혼으로 묶을수는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교회법상 성혼이 성립되지 않을 요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죠.
하지만 마르가레테가 프랑스 궁정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루이 11세는 사망합니다. 그리고 마르가레테의 약혼자인 샤를이 13살의 나이로 샤를 8세로 즉위합니다. 겨우 세살이었던 마르가레테는 미래의 왕비가 될 여성이었기에 이에 대한 교육을 주로 받았으며 교육은 프랑스의 왕녀들과 같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마르가레테는 다양한 왕족과 귀족 자녀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훗날 프랑수아 1세의 아머니가 되는 사보이의 루이즈도 있었습니다.
11살 무렵의 마르가레테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하게된 마르가레테는 남편이 될 샤를에 대한 애정이 점점 깊어져갔습니다. 하지만 마르가레테가 11살이 되던해 모든것이 변합니다. 1491년 브르타뉴 공작이 사망하고 그의 영지는 외동딸인 안에게 돌아갑니다. 안은 이미 마르가레테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혼"까지 마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샤를 8세는 브르타뉴로 쳐들어갔고 안에게 강제로 결혼을 무효화하라고 강요합니다. 합스부르크가문은 프랑스 내부에 있던 브르타뉴쪽에 도울만한 처지가 못됐고 결국 안은 막시밀리안과의 결혼을 무효화합니다. 그리고 샤를은 브르타뉴 공작령을 얻기 위해 스스로 안과 결혼합니다. 이것은 마르가레테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는데 3살때 프랑스 궁정으로 와서 11살이 될때까지 "프랑스 왕비"가 되리라고 여기면서 살았었는데 약혼자가 이 모든것을 깨버렸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가 결혼하려던 여성은 마르가레테의 새어머니가 될 여성이기도 했었죠. 약혼이 깨졌지만 마르가레테는 돌아갈수도 없었는데 1493년 아버지가 샤를8세와 다시 조약을 체결한 후에야 부르고뉴 공작부인인 요크의 마거릿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르가테레에게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는데 이후 마르가레테는 평생 프랑스에 대해 적대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브르타뉴의 안과 프랑스의 샤를 8세
부르고뉴에서 지내던 마르가레테에게 다시한번 혼담이 들어옵니다. 그녀의 아버지 막시밀리안은 에스파냐와 동맹관계를 맺게 되고 이를 확고하게 하기 위해 이중결혼을 선택합니다. 막시밀리안의 후계자이자 마르가레테의 오빠인 필립은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도 국왕의 딸인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와 결혼했으며, 마르가레테는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도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식하기로 합니다.
1496년 마르가레테는 머물고 있던 네덜란드를 떠났고 이듬해인 1497년 후안과 마르가레테는 결혼합니다. 후안은 마르가레테에 대해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의 누이인 후아나가 마르가레테의 오빠인 필립을 매우 사랑했던것과 비슷했죠. 하지만 궁정에서는 이에 대해서 매우 우려하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후안의 건강상태가 많이 나빴기때문이죠. 마르가레테는 다정한 성격에 즐거운것을 좋아했으며 매우 뛰어난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결혼하러 에스파냐에 왔을때 배가 폭풍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때 마르가레테는 자신이 에스파냐에 닿기 전에 죽을것이라고 생각하고 비명을 미리 썼다고 합니다.
" 두번이나 결혼했었던 헌신적인 신부였지만- 죽을땐 처녀였던 Margot 여기 잠들다."
마르가레테
결혼식 겨우 6개월후 마르가레테의 남편인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이 사망합니다. 그때 마르가레테는 임신중이었는데 남편이 죽은지 두달후 딸은 사산하죠. 1500년 마르가레테는 오빠와 올케가 있는 네덜란드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때 그녀는 막 태어난 오빠의 아들의 카를의 대모가 되어주죠. 그가 바로 후에 황제가 될 카를 5세였습니다.
마르가레테의 첫번째 남편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
1501년 21살의 마르가레테는 동갑이었던 사보이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재혼합니다. 필리베르토 2세의 누이가 바로 사보이의 루이즈로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였죠. 하지만 필리베르토도 결혼 3년후인 1504년 자녀없이 사망합니다. 필리베르토가 죽은후 마르가레테는 24살의 나이었지만 더이상 재혼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합니다. 후에 마르가레테의궁정에서는 마르가레테에 대해 "Dame de deuil(Lady of Mourning-상중의 귀부인 정도로 해석될듯합니다.)"라는 이름을 붙여줬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의 두번째 남편
사보이의 필리베르토 2세
남편이 죽은후 마르가레테의 정치적 입지는 강화됩니다. 그녀는 1506년 오빠 필립이 사망하자 프랑슈-콩테 지방의 통치자로 선출됩니다.또 그녀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는 딸을 저지주(Low Countries)의 총독이자 이를 물려받게될 카를의 후견인으로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녀는 당시 유럽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독립적 권리(어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물려받은)를 통해 홀로 통치한 여성군주였습니다. 이후 다시 섭정지위로 돌아가긴 하지만 네덜란드에서 마르가레테의 위치는 매우 중요했는데 그녀는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1세와 네덜란드 신하들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부르고뉴 공작령의 여러 주들이 비록 마리 드 부르고뉴의 상속을 인정하긴 했지만 중앙정부에 대해서 자치강하게 원했던것을 고려하면 마르가레테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할수 있습니다. 1515년 마르가레테의 조카인 카를이 에스파냐를 상속받게 되면서 그는 고모의 지위를 섭정의 지위로만 낮추고 네덜란드에서의 고모의 영향력을 경계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곧 마르가레테가 현명한 조언자임을 깨달았고 다시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1529년에는 프랑수아 1세와 카를 5세 사이의 전쟁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시누이이자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의 루이즈와 함께 평화협정을 체결하기도 하죠.(이를 귀부인들의 평화협정-Paix des Dame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마르가레테
마르가레테가 통치하던 시기의 네덜란드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몇몇 가문의 힘을 억제하는것에 실패해서 마르가레테가 죽을때까지 문제가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는 매우 잘 교육받았는데 악기를 몇개나 다룰 줄 알았으며 시를 쓰고 읽는것을 매우 즐겼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의 궁정에는 수많은 인문주의자들이 다녀갔는데 그중에는 에라스무스같은 위대한 학자도 있었습니다. 마르가레테의 도서관은 자료가 매우 많았다고 합니다. 또 그녀는 친척이나 여러 정치적 협력자들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게 하기도 했었습니다. 또 화가들 역시 지원해줬죠.
마르가레테는 그녀의 네덜란드 거처에서 사망했으며 두번째 남편인 필리베르토와 함께 묻혔습니다.
마르가레테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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