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레오노르 : 미남왕 필립의 딸

엘아라 2012. 7. 2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필립과 후아나의 딸들에 대해서 볼까합니다.

사실 예전에 스웨덴의 왕비들에 대해서 볼때 딸들중 한명을 봤었는데 전체에 대해서 보게 될줄은 몰랐네요...아하하...


레오노르 또는 엘레오노르는 프랑스로 시집간 합스부르크 가문 여성으로 두 가문은 숙적이었기에 후대의 다른 왕비들 처럼 불행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루이 13세의 왕비인 안 왕비)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4)레오노르 : 미남왕 필립의 딸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카스티야의 레오노르

포르투갈의 왕비

프랑스의 왕비

Eleanor of Austria 

(15 November 1498 – 25 February 1558), 


엘레오노레,레오노르,엘레노르등으로 불렸던 레오노르는 "미남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오스트리아의 필립과 그의 부인인 후아나 라 로카 (미친 후아나)의 큰딸로 태어났습니다. 

레오노르의 아버지인 필립은 부르고뉴 공작으로 어머니인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부르고뉴 공작령을 상속받은 상태였죠. 레오노르의 어머니인 후아나는 카스티야의 여왕 이사벨라와 아라곤의 국왕 페르디난도의 딸로 그녀의 언니 오빠가 모두 사망하면서 에스파냐의 상속녀가 되는 사람입니다. 후아나는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이 죽자 남편과 함께 "카스티야"의 공동국왕이 됩니다만 정치는 남편이 했었죠. 

남편을 무척이나 사랑했었던 후아나는 남편이 한눈 파는것을 견딜수 없어했는데 남편이 연애질 하려는 시녀들에게 몹시 질투심을 느꼈다고 합니다. 젊은 나이에 남편이 죽자 후아나는 남편의 시신을 묻는것을 거부하고 자기 곁에 뒀습니다. 그리고 늘 "상복"을 입고 우중충하게 살았죠. 이때문에 후아나는 "미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됩니다. 하지만 후아나의 행동에 대해 여러가지 이야기도 많은데 일단 정치적 목적으로 후아나가 정치에 관여하는것을 막기 위해 그녀의 행동을 방관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또 후대의 다른 과부가 된 왕비나 여왕들의 행동(이를테면 빅토리아 여왕)과도 비교했을때 남편의 시신을 영묘에 묻지 않은것 빼고는 그다지 다를바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레오노르의 부모

필립과 후아나



레오노르는 1506년 아버지가 죽자 동생들인 카를. 이사벨라, 마리와 함께 어머니를 떠나 고모이자 외숙모인 네덜란드 총독 마르가레테에게 보내집니다. 아이들이 고모에게 보내진 가장 큰 이유는 후아나가 남편의 죽음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기에 아이들을 돌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만, 정치적 이유도 어느정도 있었으르라 추정됩니다. 후아나 곁에는 아들인 페르디난트와 막내딸인 카타리나가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마르가레테는 조카들에게 매우 훌륭한 교육을 시켰고,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뛰어난 학자들이 이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동생들과 함께 있는 레오노르(가운데)

왼쪽 남자아이는 카를 5세, 오른쪽은 후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의 왕비였던 이사벨라(엘리자베트)입니다.


레오노르의 친척들은 레오노르를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인 헨리와 결혼시키려했습니다. 하지만 헨리의 아버지인 헨리 7세는 헨리를 큰아들의 아내였던 레오노르의 이모 아라곤의 카타리나와 결혼시키려했으며 복잡한 과정을 걸쳐서 카타리나가 헨리 8세와 결혼하게 되죠. (하지만 나중에 이혼) 

이후 레오노르의 가족들은 또 다른 혼담을 추진합니다. 프랑스의 루이 12세나 폴란드의 국왕인 지그문트 1세와의 결혼을 추진하지만 이 혼담들 역시 성사되지 않습니다. 또 로렌의 공작인 앙투안(후에 앙리 3세의 왕비가 되는 로렌의 루이즈의 할아버지)와의 혼담도 추진되지만 이뤄지지 않았죠.


1517년 레오노르는 팔츠의 선제후가 되는 프리드리히(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프리드리히는 네덜란드에서 성장했으며 합스부르크가문의 궁정에 출입하던 인물이었죠. 프리드리히와 레오노르의 연애편지를 발견한 레오노르의 동생 카를은 매우 놀랐으며, 누나와 프리드리히를 갈라놓습니다. 그는 둘이 비밀결혼하지 않았다는 맹세를 받은후, 자신이 국왕으로 있던 에스파냐로 누나를 데리고 갑니다.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


1518년 레오노르는 포르투갈의 국왕이었던 마누엘 1세와 결혼합니다. 이미 마누엘1세는 레오노르의 두 이모인 이사벨라와 마리아와 결혼했었던 사람이었죠. 사실 레오노르와 혼담이 오갔던 사람은 마누엘 1세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가 되는 주앙(후에 주앙3세)였습니다. 하지만 마누엘 1세의 두번째 아내이자 레오노르의 이모였던 마리아가 1517년 사망하자 포르투갈과의 동맹관계가 벌어질것을 우려한 레오노르의 동생 카를이 누나를 이모부와 결혼시킨것이었죠. 마누엘 1세와의 사이에 두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만 성인으로 성장한 사람은 딸인 인판타 마리아밖에 없었습니다. 결혼 3년만인 1521년 레오노르의 남편인 마누엘 1세는 페스트로 사망하게 되었고 23살의 나이로 과부가 된 레오노르는 다시 동생인 카를이 있는 에스파냐 궁정으로 돌아옵니다.



레오노르의 첫번째 남편

마누엘 1세


레오노르는 다시 팔츠의 프리드리히와의 관계를 기대했을수도 있었습니다만, 카를은 누나를 다시 정치적 목적으로 결혼시키려 합니다. 그는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에 대항하기 위해 누나를 부르봉 공작인 샤를 3세와 약혼시킵니다. 하지만 이 결혼식은 성사되지 못했는데 레오노르는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하게 되기 때문이었죠. 1525년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의 포로로 붙잡히게 됩니다. 카를  5세는 그와 레오노르를 약혼시켰습니다. 1526년 프랑수아 1세는 여러가지 약속을 하고 풀려나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의 아들들을 인질로 에스파냐로 보내는것이 포함되어있었습니다. 

하지만 레오노르와의 결혼은 이뤄지지 않을듯보였습니다. 프랑수아 1세는 풀려난후 다시 카를 5세에 적대했고 다시 전쟁이 일어났죠. 결국 1529년 프랑수아 1세의 어머니인 사보이의 루이즈와 카를 5세의 고모인 마르가레테가 평화협정을 체결합니다. 이때 조건중 하나가 레오노르가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한다는 것이었죠.



레오노르


레오노르는 1530년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해서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그녀는 이때 딸인 인판타 마리아와 헤어지게 되는데 이후 그녀는 평생 딸을 볼수 없게 됩니다.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매우 적대적이었으며 그의 누나인 레오노르에 대해서도 푸대접을 합니다. 결혼식이후 발코니 행사때 그는 아내가 아닌 자신의 정부였던 안 드 피셀루 델리(Anne de Pisseleu d'Heilly)와 함께 같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레오노르는 프랑수아에게 거의 무시당하면서 살았습니다만, 여러가지 공식행사에서 왕비로써 참여하기도 했는데 의붓아들인 앙리와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고 합니다.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많은 왕족들 처럼 레오노르도 자선사업등에 전념을 합니다. 그리고  궁정에서 떨어져 지내던 남편의 전처 자식들인 마들레느와 마르가레트를 데려와서 함께 지내기도 하죠. 비록 남편과 사이가 좋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이해했습니다.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불화할때 늘 그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었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레오노르의 두번째 남편



1547년 남편인 프랑수아1세가 사망한후에, 1548년 레오노르는 프랑스를 떠나 브뤼셀로 갑니다. 그리고 동생인인 카를 5세가 퇴위한후, 스페인으로 가서 동생이 살던 근처에서 지내면서 카를 5세와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레오노르의 딸인 인판타 마리아는 어머니와 함께 살길 원치 않았는데 아마 어린나이에 어머니가 멀리 떠나서 무척이나 서먹한 사이가 되어서 그랬던듯합니다. 1558년 28년만에 리스본에서 딸인 인판타 마리아를 만났습니다만, 그 만남 직후 레오노르는 에스파냐로 돌아오던 길에 사망했습니다.



레오노르의 딸

인판타 마리아

비주 여공작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