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수요일은 뭘해야할지...ㅠ.ㅠ 아직도 고민입니다.
고민하다가 요즘 셜록홈즈 영화도 하고 BBC 셜록 시즌 2도 하고 그래서 잠시 셜록 홈즈와 관계된 이야기를 해볼까합니다.
이번 셜록(Sherlock,BBC,2012)에 "the Woman" 아이린 애들러가 나오는군요.
아이린 애들러는 셜록만큼 뛰어난 여성으로 셜록이 의뢰를 완벽하게 성공하지 못하게 합니다.
책에서는 확 결혼해서 미국으로 떠난것으로 기억했는데 어쨌든 그다지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셜록 홈즈가 강렬한 인상을 받은 여성이기에 후대의 많은 스토리에서 아이린과 셜록 홈즈 간에 무슨 섬씽이 있길 기대하죠.
아이린 애들러에 영감을 가장 많이 준 모델은 사실 릴리 랭트리보다는 "요부"라는 이미지로 더 유명한 롤라 몬테스라고 합니다. 롤라 몬테스는 불같은 성격에 수많은 남성편력으로 유명했으며 특히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1세의 정부가 됐을때는 국정에 개입하려 해서 국왕이 퇴위해야할 정도였죠.
(....사실 루드비히 1세의 퇴위는 롤라 몬테스 때문이 아니라 당시 자유주의가 유행했던것에 반해서 루드비히 1세가 강력한 왕권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하려했고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이 롤라 몬테스가 나타나자 결국 혁명을 일으킨것이었쬬.-0-;;; 롤라 몬테스는 그리 큰 야망이 있던 여자는 아닙니다. 겨우 "백작부인"칭호 정도와 국왕의 정부로 안정된 많은 수입을 원했을 뿐이죠.--;;;)
하지만 다른 여성들도 있는데 그중 한명이 릴리 랭트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릴리 랭트리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롤라 몬테스는 이미 해서 말입니다.--;;)
셜록홈즈중 "아이린 애들러"의 모델: 릴리 랭트리
에밀리 샬럿 르 브레턴
릴리 랭트리
레이디 드 베
Emilie Charlotte Le Breton
Lillie Langtry
Lily Langtry
(13 October 1853 – 12 February 1929)
일반적으로 "릴리 랭트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에밀리 샬럿 르 브레턴은 1853년 저지의 주임목사의 고명딸이자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후에 아버지가 성직을 떠나긴했지만, 일반적으로 중류이상의 가정이었고 릴리는 오빠들과 함께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습니다.
20살이 되던해 에밀리는 26살의 지주였던 에드워드 랭트리와 결혼합니다. 에드워드 랭트리는 이때 재혼이었는데 그의 죽은 전처는 에밀리의 올케의 동생이었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랭트리는 부유했고 둘은 결국 런던으로 옮겨가서 살았습니다. 런던으로 갔을때 릴리는 새로운 삶을 경험하게 되죠. 바로 상류사회 사람들과 교류하게 된것입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상류사회의 사람과 만난것은 우연이었는데 한 화가가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반해서 모델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초상화는 레오폴드 왕자(아마도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듯합니다.)가 샀죠.이때이후 그녀는 많은 상류사회 사람들과 교류하기 시작하죠.
릴리 랭트리
아버지이 친구였던 래낼리경(7대 래낼리 자작 토마스 존슨)의 소개로 상류사회에 입문하게된 그녀는 아름다움과 재치로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합니다. 에밀리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위트 외에는 다른것으로 꾸미지 않았는데 수수하게 보석을 하지 않고 옷도 검은옷만 입음으로써 도리어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냈죠. 이런 에밀리의 모습에 많은 이들이 반했고 존 에버렛 밀리아스 경이 그린 "저지의 백합(릴리)"이라는 초상화는 릴리의 이런 특징을 잘 드러냈습니다. 제목이 저지의 릴리가 된 이유는 백합이 저지주의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에밀리는 "릴리 랭트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것이죠.
저지의 릴리
이 그림에 붙은 제목 이후 "릴리 랭트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집니다.
사교계에서 널리 알려지게 된 릴리는 친구였던 오스카 와일드와 사라 베른하르트의 권유로 무대에 서게 됩니다. 1881년 런던에서 데뷔했던 그녀는 매우 성공적인 배우가 됩니다. 릴리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으며 여러시즌동안 미국에서 공연하기도 했습니다.
무대의상을 입은 릴리 랭트리
(아마 클레오파트라?)
릴리 랭트리가 사실 더 유명했던 이유는 그녀가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에드워드 7세의 정부였다는 점입니다. 무대의 배우가 되기전 그녀는 웨일즈공의 정부가 되죠. 1877년 릴리 랭트리는 처음으로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를 만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위트있던 릴리 랭트리에게 웨일즈공은 반했고 그녀는 곧 그의 비공식 정부가 됩니다. 릴리는 다른 왕실 가족들과도 잘 지냈는데 특히 아들의 정부라면 질겁을 했던 빅토리아 여왕을 알현하기도 했으며 남편의 정부들을 싫어했던 웨일즈 공비와도 잘 지낼정도였다고 합니다.
(웨일즈 공비 알렉산드라는 매우 아름답고 다정다감했지만 에드워드 7세가 좋아했던 지적이고 위트있는 여성은 아니었죠.)
웨일즈공과의 관계는 약 1880년까지 유지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이미 이전에 둘 사이는 끝났으리라 추측됩니다. 왜냐면 1879년경 릴리는 많은 남자들과의 관계가 알려지게 되었고 웨일즈공은 점점 그녀를 덜 만났습니다.
릴리 랭트리
1879년 릴리 랭트리는 많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고 그중에는 웨일즈공의 조언자이자 잘생긴 해군 사관이었던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880년 릴리 랭트리는 임신하게 되죠. 릴리 랭트리는 아이가 루드비히의 아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만 현재 일부 학자들은 루드비히의 아이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 스캔들때문에 루드비히는 릴리 랭트리와의 결혼을 심각하게 고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릴리 랭트리는 돈을 받는것으로 루드비히와의 관계를 정리했고 루드비히는 세계 일주를 하는 영국 해군 군함으로 발령나서 멀리 바다로 떠나야했습니다.
릴리 랭트리의 외동딸인 젠 마리 랭트리의 교육비는 루드비히의 가문에서 지원해줬습니다. 루드비히의 아들이었던 루이스 마운트배튼경은 잰 마리 랭트리가 자신의 누나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죠.
릴리 랭트리
배우로써 이름을 얻었던 릴리 랭트리는 이후 미국인들과 교류를 합니다. 그녀는 특히 경주마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릴리의 말이 경주대회에서 우승하기도 했었죠.
1897년 릴리 랭트리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으며 남편과 이혼합니다. 하지만 이혼했던 그해 릴리의 남편인 에드워드 랭트리는 사고로 사망합니다. 후에 릴리 랭트리는 남편의 죽음에 대해 "난 너무 늦게 남편을 잃었다 하지만 그를 잃은 것이 그다지 큰 손실은 아니었다"라고 언급합니다.
미국에서 릴리 랭트리는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으며, 주로 경주마를 기르는데 관심을 가집니다.
1899년 릴리 랭트리는 자신보다 18살이나 어린 휴고 제랄드 드 베와 재혼합니다. 그는 준남작이자 뛰어난 경주마를 소유했던 사람이기도 했죠. 릴리 랭트리는 후에 모나코에서 남편과 다른집에서 살아갑니다. 둘의 관계는 서로 독립적인 관계로 휴고는 릴리 랭트리가 요청할때만 그녀의 집으로 왔다고 합니다.
릴리 랭트리는 1929년 모나코에서 사망했으며 저지에 묻혔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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