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에디에 대해서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이었는데 에디에 대해서는 이미 글을 썼었답니다.
하지만 시리즈에 넣는다는 의미로 다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네 사실 다음에 넣을 인물인 올드 프리텐더에 대해서 글을 안 읽었습니다..ㅠ.ㅠ)
그럼 이야기해볼까합니다.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들
(7)클라렌스와 애본대일의 공작 앨버트 빅터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에드워드 7세의 장남
웨일즈의 앨버트 빅터
클라렌스와 애본대일의 공작
에드워드 7세의 장남
Prince Albert Victor, Duke of Clarence and Avondale
(Albert Victor Christian Edward; 8 January 1864 – 14 January 1892)
앨버트 빅터 크리스천 에드워드는 1864년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이자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에드워드 7세와 그의 부인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두달일찍 조산으로 태어났고 이때문에 어린시절 매우 허약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첫번째 친손자이자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될 손자에게 자신과 사랑하는 남편의 이름을 붙이길 원했습니다. 아들 부부의 의견은 묻지 않았구요. 결국 아이의 이름은 여왕의 뜻대로 앨버트 빅터라는 이름으로 되었고 뒤에 크리스천(외할아버지의 이름)과 에드워드(아버지의 이름)이 더 붙게 됩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그를 "에디"라는 애칭으로 불렀습니다.
장남인 에디를 안고 있는 웨일즈공부부(에드워드 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
동생인 조지와 연년생인 그는 동생과 함께 교육을 받습니다. 웨일즈공 부부는 자녀 교육에서는 의견일치를 봤는데 "자유방임주의"를 원했습니다. 웨일즈공은 어린시절 부모의 과도한 교육열로 인해 힘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웨일즈 공비는 어린시절 아버지가 왕위계승자가 되기전 가족적 삶을 무척이나 좋아했었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왕위계승자가 될 손자의 교육을 방관만할수 없었고 결국 손자들의 교육에 개입하게 됩니다.
딸 베아트리스 공주와 함께 있는 빅토리아 여왕
1880년대
여왕은 자녀들과 신하들에게 매우 두려운 존재였는데 여왕의 개인비서는 여왕을 두려워하지 않던 사람들로 "존 브라운,프린스 임페리얼 루이 나폴레옹 외젠"등을 꼽았습니다. 아마도 베아트리스의 남편인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역시 여기에 포함될것입니다만, 다른 모든 사람들은 여왕의 고집을 꺽지 못했습니다. 여왕이 우울해하거나 화를 내면 자녀들은 물론 어느 누구도 간섭하지 못했는데 언니인 페오도라는 여왕에게 "말하기가 두렵다"라고 할정도였습니다.
...비록 좋은 엄마는 아니었지만 좋은 할머니긴 했다고 합니다.
에디와 조지는 함께 빅토리아 여왕이 임명한 가정교사인 존 달튼의 교육을 받습니다. 왕자들의 교육에 대한 그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평가가 있는데 에디의 전기 저자중 한명은 그에 대해서 자신의 실패(왕자들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못한것)를 에디의 능력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에디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해서 "덜떨어진 인물"로 묘사되는것은 상당부분 달튼의 변명에 따른것이라고 주장하죠.
어쨌든 이런 교육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듯한데 후에 에디가 대학에 들어갈때 한 교수가"읽는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듯하다"라고 평가한것이 그 예일듯합니다.
당시 왕실 주변의 사람들은 에디가 조산아로 태어났기 때문에 학습부진이 있는것을 당연히 여긴듯 합니다.
1875년 에디
에디가 13살이 되던해인 1877년 에디와 그의 동생 조지는 해군에 들어갑니다. 이는 해군에서의 교육이 소년들에게 도움이 될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리고 1879년에는 두 왕자들은 달튼과 더불어 영국 군함을 타고 3년간 전세계를 여행합니다. 영국의 왕위계승자가 영국과 그 식민지들을 돌아다니면서 그곳 주민들을 방문하는것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시 달튼이 여기에 동행했는데 앞에서 말한 에디의 전기 저자는 이 여행은 오직 달튼의 정치적 목적만 달성했다라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1883년 여행에서 돌아온 에디와 조지는 서로 다른길을 갑니다. 조지는 해군에 남아서 해군 장교가 되었던 반면 에디는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대학생활을 즐긴후 1885년 그는 육군 장교가 되면서 의무를 시작하죠.
1880년대 후반
에디와 조지
나이가 어느정도 되기 시작하자 에디에게 혼담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미혼인 왕족들은 스캔들의 우려가 있었는데다가 아버지 웨일즈공은 이미 몇몇 스캔들로 악명이 자자했습니다. 그가 첫번째로 염두에 둔 사람은 사촌인 헤센의 알릭스였습니다. 에디의 고모인 앨리스 공주와 헤센 대공의 딸이었던 알릭스는 매우 어여쁜 여성이었죠. 1889년 에디는 알릭스의 형부이자 자신의 멘토였던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에게 "알릭스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녀가 자랄때까지 기다리겠다"라고 편지를 보냅니다. 하지만 알릭스와 에디는 가망이 없었죠.
에디의 헤센 사촌들
맨 왼쪽이 알릭스
1889년 에디는 치명적인 스캔들에 휘말립니다. 일명 "클리브랜드 스트리트 스캔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몇몇 귀족들이 연류되면서 문제가 된 사건입니다. 발단은 한 전보배달 소년이 현금을 가지고 있던것으로 시작됩니다. 당시 전부배달소년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불법이었기에 경찰에서는 그가 도둑질한것이라고 여겼죠. 하지만 사건을 조사하면서 일이 커지게 됩니다. 그 소년이 가지고 있던것은 사실 "화대"였던것이죠. 소년들이 남성들을 상대로하는 매춘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거기에는 웨일즈공의 측근인 몇몇 귀족들도 있었습니다. 이문제는 미묘한것이었는데, 도덕적 관념에서 "동성연애"는 용서할수 없는것이었지만, 귀족들을 처벌하는것은 위험한것이었습니다. 당시 공화주의가 활발해지고 있던 시기였기에 만약 귀족들을 처벌한다면 이런 측근을 가진 왕가에 대한 권위가 떨어질것이기 때문이었죠.
이런점을 간파한 한 귀족의 변호사는 경찰들에게 관련된 고위계층이 더있다고 떠벌리고 다닙니다. 그중에 한명이 "PAV"라는것이었죠. 바로 Prince Albert Victor라는것입니다. 이때문에 이사건은 더욱더 감춰져야했고 에디는 스캔들에서 멀리 떨어져야했습니다.
하지만 실상 에디가 이 스캔들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은 없으며, 그가 관련되었다는 주장은 자신의 변호인을 구하기 위한 변호사의 과장이라고 여겨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후에 에디가 "동성연애자"라고 알려지는 중요한 사건중 하나가 됩니다.
사실 이때 에디는 인도 방문이 예정되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영국 정부는 얼른 그를 예정대로 인도로 보내버립니다. 이때 에디는 유부녀였던 한 여성과 만나게 됩니다. 에디가 죽은후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에디의 아들이라 주장합니다만 왕실에서는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하죠. 그뒤에 그녀의 아들은 어머니의 주장을 이어받아 책을 쓰고 돈을 요구합니다. 결국 조지 5세에 의해 명예훼손혐의로 고발당했고 그가 에디의 아들이 아니라는 증거가 나타났기에 결국 감옥에 가게 됩니다.
인도에서 돌아온 에디는 빅토리아 여왕의 표현대로 알릭스와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것을 알게됩니다. 에디가 인도에 가있는 동안 알릭스는 언니를 만나러 러시아에 갔다가 러시아의 황태자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사랑에 빠졌던것입니다.
알릭스와 니콜라이 2세의 약혼사진
둘다 에디의 사촌이었습니다.
알릭스의 어머니는 에디의고모였고, 니콜라이 2세의 어머니는 에디의 이모였죠.
알릭스에게 거절당한후 에디는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집니다. 바로 엘렌 도를레앙이었습니다. 엘렌은 파리 백작의 딸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좋지 않은 혼담이었는데 영국에서 카톨릭 교도인 프랑스 여성은 절대 환영받지 못할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이전에 카톨릭 교도이자 프랑스 여성인 왕비는 헨리에타 마리아였는데 그녀가 왕비였을때 잉글랜드의 내전(청교도 혁명)이 일어났죠. 게다가 카톨릭교도와 결혼하면 왕위계승권이 박탈당한다는 영국의 법률또한 무시할수 없었습니다.
에디는 엘렌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결국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에게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엘렌은 개종하겠다고 했으며, 에디는 왕위계승권을 포기할수 있다고도 합니다. 결국 여왕은 둘의 결혼을 지지해줍니다. 하지만 엘렌의 아버지는 그 결혼을 승락하지 않았으며 교황 역시 결혼을 반대합니다.이때문에 결국 둘은 헤어질수 밖에 없었죠.
엘렌 도를레앙
아오스타 공작부인
1903년
에디가 죽기전 마지막으로 한말이 엘렌이었다고 합니다.
엘렌의 언니는 포르투갈의 왕비였습니다. 이집안은 딸들이 몽땅 키가 큰데 엘렌도 역시 키가 커서 역시나 키큰 에디와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엘렌과 헤어진후 에디는 레이디 시빌 얼스킨와 잠시 사랑에 빠집니다. 하지만 그녀는 영국의 왕비가 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에디는 집안에서 짝지워주는 사람과 결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영국 왕가에서 선택한 여성은 테크의 메리였습니다.
레이디 시빌 얼스킨
둘의 연애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테크의 메리는 빅토리아 여왕의 사촌인 캠브리지의 메리 아델라이드와 그녀의 남편인 테크 공작 프란시스의 딸이었습니다. 테크 공작은 원래 뷔르템베르크 왕가의 방계 가문출신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귀천상혼했기에 왕위계승권은 박탈당한 상태였죠. 테크의 메리는 비록 외가가 영국 왕실이긴했지만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이었기에 당시에는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낮다고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의무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이런 메리를 높이 평가했고 메리의 신분따위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에디의 약혼은 갑작스러운것이었는데 에디는 바텐베르크의 루이스공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약혼이 갑작스러운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정착할때라고 언급합니다.
테크의 메리
"메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그녀는 매우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디가 죽은후 그의 관에 자신의 결혼식에 쓸려고 마련했던 부케를 놔뒀다고 합니다.
결혼과 동시에 아일랜드 총독이 되기로 되어있었던 에디는 1892년 1월 갑작스럽게 사망합니다. 결혼식을 한달도 안남겨둔 상태였죠. 에디가 죽은것은 당시 유행했던 인플루엔자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디의 죽음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는데, 특히 에디의 부모인 웨일즈 공 부부의 상심은 말로 헤아릴수 없었습니다. 약혼자를 잃은 메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웨일즈 공 부부의 모습을 "자신이 본 가장 슬픈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웨일즈공은 죽은 아들 곁을 떠나지도 못했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디와 자신의 목숨을 바꾸어도 좋다고 이야기할정도였습니다.
웨일즈 공 부부와 자녀들
에드워드 7세는 불성실한 남편이었고,이때문에 자녀들에 대해서 아내의 의견을 그대로 따르는 경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도 좋은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에디가 죽은후 왕위는 동생인 조지에게 물려졌고, 약혼녀였던 메리 역시 조지와 결혼하죠.
한 역사가는 "에디는 존재가 잊혀졌을뿐아니라 그에 대한 좋은 평가도 잊혀졌다"라고 언급합니다. 한 아마추어 범죄학자의 어설픈 이론은 에디를 "잭더리퍼"와 동일하게 뒀으며,이때문에 사람들은 에디를 "이상하고 별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 자신이 에디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외할머니와 에디가 정식으로 결혼했으며 왕가에서는 이를 은폐하려 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역시 잭더리퍼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사람들의 관심대상이 됩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프롬헬"이라는 헐리우드 영화가 만들어질정도였죠.
하지만 조지 5세가 즉위할때까지만 하더라도 "오 에디가 있었다면..(더 좋은 국왕이 됐을것이다)"라는 이야기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평생해군으로 지낸 조지 5세보다는 대학을 다니면서 더많은 이들과 교류한 에디가 사람들과 더 자연스럽게 어울렸을것이며,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서도 진보적인 관점(아일랜드 자치를 허용해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이죠.
자료출처
1.위키피디어
2.Channel 4
3.Channel 4의 다큐멘터리 Prince Eddy : we never had been
사진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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