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번에 다룰 사람은 샬럿 공주입니다.
조지 4세의 딸이었던 그녀는 빅토리아 여왕의 외숙모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나기도 전에 사망했죠. 그녀가 죽음으로써 켄트 공작과 윌리엄 4세는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았고 결국 빅토리아 여왕이 태어나게 됩니다.
샬럿의 삶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부모는 불화했으며,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았으면서 순전히 아내를 미워해서 딸과 아내를 만나지 못하게 할 정도였죠.
그리고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합니다.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들...(6) 웨일즈의 샬럿 공주 : 조지 4세의 외동딸
웨일즈의 샬럿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Wales
(Charlotte Augusta; 7 January 1796 – 6 November 1817)
샬럿은 당시 웨일즈 공이었던 조지 4세와 그의 부인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사실 조지 4세의 결혼은 매우 복잡했습니다.
그는 이미 카톨릭 교도였던 한 여성과 비밀리에 결혼했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매우 심각한 일로 카톨릭교도와의 결혼이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는 일이었죠. 그는 공식적으로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는데 결국 빚이 63만파운드에 달하자 부채탕감을 조건으로 아버지 조지3세의 조건(신교도인 왕족)에 맞는 여성과 결혼하기로 합니다.
그는 사촌들 중에 신부를 선택할수 있었습니다. 외가쪽 사촌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와 친가쪽 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카롤리네였죠. 모두들 카롤리네보다는 루이제가 더 괜찮은 신부감이라고 여겼지만, 웨일즈공은 카롤리네와 결혼을 결정합니다. 이는 당시 웨일즈공이 관심을 가지고 있던 여성인 저지 백작부인 프랜시스 빌리어스의 영향으로 추정합니다. 아무래도 루이제보다는 카롤리네가 덜 매력적이어서 웨일즈공의 관심이 자신에게 계속 머물수 있을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참고로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결혼해서 나폴레옹과의 일화로 유명한 그 루이제 왕비가 됩니다.
샬럿의 부모
영국의 조지 4세와 캐롤라인 왕비
둘은 평생 싸워댔으며 조지 4세는 아내와 어떻게든 이혼하려했고 그에 맞서 캐롤라인은 어떻게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려했습니다. 이후 이 문제는 영국 법정에까지 서게 되죠.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채 만난 웨일즈공과 카롤리네는 둘다 서로에게 실망을 합니다. 카롤리네(영국식으로는 캐롤라인)은 촌스러웠으며 웨일즈공은 다른 여자(마리아 피츠허버트)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은 결혼 삼주만에 완전히 별거합니다. 하지만 딱 결혼식 구개월후에 딸인 샬럿이 태어나죠. 후에 부인과 사이가 극한으로 나빠진 조지 4세는 자신의 딸의 탄생은 기적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내와 세번정도밖에 동침하지 않았는데 태어난 딸이라는것이죠.
딸이 태어났을때 웨일즈공은 실망합니다. 후계자가 될 아들이 아니어서였죠. 하지만 할아버지인 조지 3세는 자신의 적자인 손녀가 태어난것에 무척이나 기뻐했으며 아들과 며느리가 아이때문이라도 다시 합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부부사이는 여전히 냉랭했습니다. 웨일즈공은 아내가 딸을 홀로만나는것을 거절했고, 아이의 양육에 절대 개입하는것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웨일즈공의 고용인들은 캐롤라인에게 동정적이었으며 웨일즈공 몰래 아이를 단둘이 만나도록 해줬습니다. 웨일즈공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이유는 딸을 거의 만나러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사람들은 캐롤라인에게 매우 동정적이 되었습니다. 자신은 딸을 돌보지도 않으면서 아내에게 딸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것이었으니까요.
샬럿의 어머니 캐롤라인
샬럿은 매우 건강한 아이였습니다만, 어린시절 그녀의 삶은 험난하기만 했습니다. 샬럿의 부모는 아이를 자신들의 싸움에 유리한 존재로만 파악해서 서로 아이를 가지겠다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런 다툼에서 승리한사람은 아버지인 웨일즈공이었죠. 그는 딸을 내려버두었고, 자신이 편한대로 딸의 처소를 바꾸거나 딸이 애정을 가지고 있던 고용인들을 해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샬럿은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던 가정교사들 손에 자랐습니다. 어린시절 샬럿은 톰보이 기질의 소녀에 승마를 매우 좋아하는 활달한 소녀였습니다 웨일즈공은 자신의 딸이 승마에 뛰어난것에 자부심을 가졌기에 딸이 말을 타는것을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짜르트와 하이든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샬럿이 청소년기에 이르르자 그녀는 심한 반항아가 됩니다.
10살 무렵의 샬럿
샬럿의 할아버지인 조지 3세는 샬럿이 언젠가는 여왕이 될것이라고 여겼으며, 손녀의 교육에 관여했습니다. 샬럿 역시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할아버지를 굉장히 좋아했죠. 이때문에 조지3세가 정신적 문제로 더이상 국정을 통치할수 없게되자 할아버지의 병을 매우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때 샬럿의 아버지인 웨일즈공이 섭정이 되었는데, 샬럿과 웨일즈공은 모두 열렬한 휘그당 지지자였습니다. 하지만 웨일즈공이 왕권을 위해 특정정당에 대한 노골적 지지를 하지 않은 반면 십대인 그의 후계자인 샬럿은 대놓고 휘그당에 대한 노골적 지지를 표명합니다.
웨일즈공은 열다섯살인 딸을 성인으로써 행동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지 못합니다. 하지만 웨일즈공이 국사로 바쁜동안 샬럿은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샬럿이 경기병대의 한 장교와 사적으로 자주 만나자 샬럿의 가정교사는 이에 대해 매우 우려합니다. 하지만 결국 둘은 아무일없이 끝납니다. 왕실에서는 이런 만남을 알아차렸지만, 웨일즈공은 딸을 간섭할수 없었습니다.
왕실에서는 살렷의 결혼을 서둘렀는데, 신랑감으로는 네덜란드의 빌렘 1세의 아들인 오라녜공 빌렘이었습니다. 하지만 샬럿은 그에 대해서 심드렁해했고, 그녀의 아버지는 다른 영국 왕족인 글로스터 공작 윌리엄과 딸을 결혼시키려했습니다. 둘중에 하나를 택해야하는 시점이었기에 결국 샬럿은 네덜란드 왕자쪽을 선택합니다. 이는 외교적으로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샬럿은 영국의 여왕이 될 사람이었고 오라녜공은 네덜란드의 국왕이 될 사람이었죠. 이 둘의 결혼으로 자녀가 태어날경우 영지는 어떻게 될것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외교적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동안 샬럿의 마음은 다른곳을 향합니다. 프로이센의 왕자들중 한명이었죠. 이때 샬럿은 다른 남자도 한명 만나게 됩니다. 러시아 기병대 장군이었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공을 만난 샬럿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으며 다시 그를 방문해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눴고 이에 대해 아버지에게 편지를 씁니다. 웨일즈공은 그에게 흥미를 느꼈지만 사윗감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죠.
러시아 장군 복장의 레오폴트
샬럿의 어머니인 캐롤라인은 오라녜공과 딸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이는 대중의 지지를 얻죠. 샬럿은 만약 자신이 오라녜공과 결혼한다고 하더라도 아버지 허락없이 어머니를 볼수없으리라는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오라녜공이 동의하지 않자 약혼을 깨버리죠. 이에 웨일즈공은 화가나서 딸을 가두고 오직 할머니인 샬럿 왕비만을 만나러 가도록 허락합니다. 이에 샬럿은 어머니에게로 도망가려다가 붙잡힙니다.
샬럿이 도망가려다 붙잡혔다는 소식이 퍼지자 사람들은 웨일즈공에 대해 더욱더 좋지 않게 생각하게 됩니다. 웨일즈공은 살럿을 감시인을 붙여 감시하도록합니다. 이에 샬럿은 가장 좋아한 숙부인 서섹스 공작 아우구스투스에게 부탁했고 그는 토리당의 총리에게 부탁해서 공주를 감시에서 벗어가게 하려했습니다. 이에 웨일즈공은 동생을 불렀고 형제는 싸운뒤 서섹스 공작은 다시는 형과 말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샬럿은 감시당했고 어머니와 함께 살아갈 희망이 사라졌지만, 처지는 조금씩 나아집니다. 웨일즈공은 언제까지 딸을 가둬둘수 없었죠. 그녀는 프로이센 왕자들중 한명과 결혼하길 바랬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아버지와의 사이는 더 벌어집니다. 결국 샬럿은 다른 대안을 찾습니다.바로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였죠.
1815년 샬럿은 레오폴트와의 결혼을 굳게 결심한 상황이었고, 웨일즈공은 오라녜공을 사위로 삼을려는 계획을 포기할수 밖에 없게 되는데 왜냐면 오라녜공이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결혼했기 때문이죠. 샬럿은 아버지에게 레오폴트와의 결혼을 허락해달라고 했지만 처음에 웨일즈공은 이 결혼에 대해서 시큰둥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일여년간의 끈질긴 설득끝에 웨일즈공은 레오폴트를 만났고, 그가 "여성들을 행복하게 해줄만한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딸의 결혼을 허락합니다. 1816년 5월 2일 샬럿과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는 결혼식을 올립니다. 둘의 결혼에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으며 모두들 미래의 영국 여왕과 그 남편이 될 사람을 축하해줬습니다.
샬럿과 레오폴트의 결혼
샬럿과 레오폴트는 굉장히 행복했는데 특히 샬럿은 남편을 열렬히 사랑했고 그의 영향력아래 들어갔습니다. 샬럿이 과하게 흥분할때 레오폴트의 한마디에 조용해지고는 했다고 합니다.
결혼초 두번의 유산이후 샬럿은 세번째로 임신했고 아이는 순조롭게 자랐습니다. 샬럿의 임신은 전 국민의 관심사였으며, 왕자나 공주 어느쪽이 태어날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었죠. 아이가 너무 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이어트를 실시했는데 이것은 도리어 샬럿의 건강을 해치는 결과를 낳습니다.
1817년 11월 3일부터 샬럿은 진통을 시작했는데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합니다. 결국 이틀이 지나서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는 거의 죽은상태로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잃긴했지만 샬럿의 상태는 양호해보였습니다. 하지만 한밤중이 되자 갑자기 샬럿은 복통을 호소했고 출혈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망하죠.
오페라 박스의 샬럿과 레오폴트
샬럿의 죽음에 영국 전체가 슬퍼했는데 샬럿은 인기없던 하노버 가문에서 유일하게 사랑받았던 왕실 가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시절부터 불행했던 이 공주에 대해 영국 국민들은 늘 동정적이었으며 핍박받는 어린 공주편이었죠. 얼마나 슬퍼했냐면 공주의 장례식날 도박장들이 자발적으로 문을 닫을 정도였습니다.
비록 불성실한 부모였지만 웨일즈 공부부역시 딸의 죽음에 충격을 받습니다. 웨일즈공은 하나밖에 없는 후계자이자 딸을 잃은데 애통해하면서 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할지경이었습니다. 웨일즈공비는 영국을 떠나있었기에 딸의 죽음을 국외에서 들어야했죠.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그녀는 실신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에 가장 슬퍼한 사람은 남편 레오폴트였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은것에 더이상의 행복은 없을것이라고 할정도였죠.
웨일즈의 샬럿
샬럿이 죽은후 영국의 왕위계승권은 문제가 됩니다. 조지 3세는 수많은 아들과 딸이 있었지만, 적자가 없었기에 이후 세대의 왕위계승자를 걱정해야했습니다. 결국 의회는 미혼인 왕자들에게 부채탕감을 조건으로 법률에 맞는 신부를 맞으라고 권했으며, 이에 조지 3세의 동생중 한명이었던 켄트 공작도 결혼을 합니다. 그가 결혼한 사람은 샬럿의 남편 레오폴트의 누나이자 과부였던 빅토리아였죠. 그리고 둘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역사이야기 > 영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들...(7) 클라렌스와 애본대일의 공작 앨버트 빅터 :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 (0) | 2011.08.04 |
---|---|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9) 메리2세 : 제임스 2세의 딸 (0) | 2011.08.02 |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8) 메리 스튜어트 : 스코틀랜드의 여왕, 제임스 1세의 어머니 (0) | 2011.07.26 |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들...(5) 웨일즈 공 프레드릭 : 조지 2세의 장남 (0) | 2011.07.21 |
잉글랜드의 여성왕위 계승자들...(7) 마거릿 튜더 : 스코틀랜드의 왕비 (0) | 2011.07.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