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드디어 자코바이트들이 나옵니다.
--;;;제임스의 사람들..이라는 뜻쯤 되는 자코바이트들은 제임스2세가 쫓겨난후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제임스2세가 영국의 정통왕위계승자이고 그의 후손이 정통계승자라는 논리라죠.
그래서 사실 올드 프리텐더를 다룰때 그냥 순서대로 넣어야하나 번외로 넣어야하나 갈등했는데, 번외로 넣기로 했습니다. 사실 그의 아버지가 퇴위당한후 그는 왕위계승 요구자로 평생 살았고 그의 후손들도 마찬가지였죠. --;;;
그래서 저는 번외로 살펴볼까합니다. 그리고 올드프리텐더부터 이어지는 왕위계승요구자들도 좀 살펴보구요.
국왕이 되지 못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들 : 번외편(1)
"올드프리텐더"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웨일즈공
올드 프리텐더
James Francis Edward, Prince of Wales
(James Francis Edward Stuart; "The Old Pretender" or "The Old Chevalier")
(10 June 1688 - 1 January 1766)
제임스2세와 모데나의 마리의 아들인 제임스 프랜시스 에드워드 스튜어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스캔들에 휩쌓였습니다. 몇몇 신교도측 인물들은 왕비가 임신하지 않았다고 까지 주장했으며, 왕비가 아이를 몰려 들여올것이라는 소문이 전 잉글랜드에 퍼져있을정도였죠.
사위인 오라녜공 빌렘이 장인에게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편지를 썼을때 잉글랜드의 몇몇 "신실한"친구들은 매우 경솔한 일이었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전 잉글랜드에 심각하게 돌았기 때문에 제임스2세는 새로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아들이 맞으며 웨일즈공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에 서명하라고 의회압박을 가할정도였죠.
올드 프리텐더의 부모
잉글랜드의 제임스 2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모데나의 마리
결국 제임스의 탄생은 잉글랜드의 신교도들을 자극했으며 그들은 잉글랜드를 구해줄 정당한 계승자인 오라녜공 메리와 그녀의 남편인 오라네공 빌렘에게 도움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네덜란드 군은 잉글랜드로 오죠. 오라녜공이 왔을때 메데나의 마리는 어린 아들의 안위를 걱정해서 서둘러 아들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제임스2세 역시 그 뒤를 따르죠.
이후 제임스2세의 가족들은 루이 14세의 보호아래 있었게 됩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미묘한 문제였는데 루이 14세가 제임스 2세와 그 가족을 보호한것은 그가 자신의 사촌이었던 점도 있긴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분쟁이 있어왔던 네덜란드의 군주인 빌렘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군주가 되면서 정치적,군사적 힘을 얻는것을 경계하기 위한것이기도 했을듯합니다.
여동생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스튜어트와 함께 있는 올드 프리텐더
1695년
아버지인 제임스 2세가 사망한후, 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위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를 지지하는 인물들은 "제임스의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자코바이트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특히 스코틀랜드쪽에서 많은 이들이 지지했습니다. 제임스에 대해서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스페인,교황령등에서 그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인정했죠. 하지만 당시 잉글랜드와 호의적 관계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참여중이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3세는 스페인의 영토를 분할 상속한다면, 루이 14세의 손자가 계승하는것을 인정하려 했습니다. 루이 14세도 이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했었구요. 하지만 스페인의 카를로스 2세는 유언장에서 스페인의 모든 영지를 루이 14세의 손자에게 물려주겠다고 발표합니다. 이에 루이 14세는 잉글랜드와의 조약을 맺을수 있는 관계를 깨버립니다. 그중 하나가 윌리엄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왕이 아니라 정통 국왕은 제임스라고 이야기합니다. 결국 전쟁은 피할수 없는 지경이 되었죠.--;;;
1705년
제임스는 무력을 통해서 왕위를 되찾으려 했지만, 바다를 건너 상륙하는데 성공하지 못합니다. 이후 그는 다시 왕위를 얻을 기회를 얻는데, 그가 카톨릭 믿음을 버리고 개종할경우에 토리당측에서는 그를 후계자로 지지하려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죠. 이때문에 결국 왕위는 앤 여왕의 육촌이 되는 하노버의 선제후인 게오르그 루드비히에게 돌아갑니다. 당대의 기록자는 게오르그 루드비히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평가를 합니다. 늙은 독일인을 국왕으로 맞이했다는것이죠. 하지만 그는 "생제르맹에서 수도사들의 지령을 받은 왕위요구자보다는 낫다"라고 조지 1세를 평가합니다. 그만큼 제임스는 잉글랜드 귀족사회의 불신을 받고 있었죠.
조지1세가 즉위하기 직전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끝나고 잉글랜드와 프랑스간에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조약의 여러 조건들 가운데서는 제임스를 프랑스에서 추방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1712년
1714년 조지 1세가 즉위하자 원래 그를 반대했던 스코틀랜드쪽에서 강하게 반발합니다. 자코바이트들은 1715년 봉기를 주도했고, 제임스 역시 스코틀랜드로 와서 이에 합류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조지 1세에게 진압당했고 제임스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야했습니다. 재미난것은 조지 1세 반역자들에게 그다지 심한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핵심 주도자를 제외한 사람들에게 벌금형으로 끝냈으며, 그 벌금 역시 스코틀랜드를 위해 쓰여졌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조지 1세가 인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 모습이 아닐까합니다.
프랑스로 돌아온 제임스는 더이상 프랑스에 머물수 없었습니다. 왜냐면 이때까지 그를 지지했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사망했기 때문이었죠. 지지자를 잃은 제임스는 프랑스를 떠나 로마로 갑니다. 교황은 카톨릭 왕위계승요구자인 그를 받아들여줬죠.
1719년 제임스는 폴란드 출신의 왕녀인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와 결혼합니다. 그녀는 폴란드 국왕이었던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손녀였죠. (폴란드의 국왕은 선출제였는데 얀 3세가 죽은뒤 여러 후보들이 난립했다고 합니다. 마리아의 아버지 역시 후보중 하나였지만 결국 왕위는 작센의 선제후에게 돌아갑니다.)
비록 아버지가 왕위를 얻지 못하긴 했지만 마리아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중의 한명이었으며 이때문에 영국 정부는 그녀와 제임스의 결혼을 방해하려했습니다. 영국과 우호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6세는 결혼하러가는 마리아를 잡아둘 정도였죠.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
올드 프리텐더와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결혼식
둘사이에서는 두아들이 태어나는데 큰아들은 후에 "영 프리텐더"나 "보니 프린스 찰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아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후에 추기경이 되는 아들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가 태어나죠.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마리아와 제임스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합니다. 마리아는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버렸는데 그녀는 남편의 바람기를 비난했죠. 반면 제임스는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고 주장합니다. 어쟀든 둘은 그렇게 헤어졌고 마리아는 32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올드 프리텐더와 마리아 클레멘티나 소비에스카의 두 아들
"영 프리텐더"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그의 동생인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
제임스의 아들인 찰스는 다시 영국 침공을 시도합니다만, 하노버 가문을 몰아내진 못합니다.
제임스는 1766년 사망합니다. 그는 죽은후 로마에 묻혔습니다. 재미난것은 그가 왕위계승요구자로 머문 시간은 64년간으로 영국에서 가장 오랜동안 국왕이었던 빅토리아 여왕이 63년간 통치한것보다 더 길다고 합니다.
1741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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