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4) 레이디 제인 그레이

엘아라 2011. 6. 21.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늘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나오면 고민되는 것이 외할머니인 메리 튜더를 따로 해야하는것이 아닐까 고민이 된다는것이죠. 메리 튜더로부터 계승권을 얻으니까요. 하지만 제인 그레이가 정식 여왕으로 인정받은것도 아니고 고작 9일간 여왕 칭호를 사용했던 사람이라 그냥 제인 그레이랑 뭉쳐서 이야기하는 편이 좋을듯합니다. 비극의 주인공인 제인 그레이에 대해서 알아볼까합니다.

예전에  당시 사료로 보는 튜더가의 여왕들에 대한 책을 잠깐 읽은 적이 있답니다. 그때 제인 그레이가 실제적으로 잉글랜드의 첫 여왕칭호를 쓴 사람이긴 하지만, 정식으로 인정받은 사람은 블러디 메리라고 나오더군요. 하여튼 복잡하더라구요...아하하...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4) 레이디 제인 그레이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헨리 8세가 사망할 당시 상당히 높은 서열의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던 여성입니다. 제인 그레이는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메리 튜더의 외손녀였습니다. 헨리 8세는 죽기전 왕위계승권을 명시할때 누나 마거릿 튜더의 스코틀랜드쪽 후손들을 모두 제외했습니다. 그때문에 제인 그레이가 서열이 높아진것이죠.

 

 

메리 튜더

프랑스의 왕비

 

헨리 8세의 여동생인 "붉은 머리"의 메리 튜더는 여러 혼담이 진행된후 프랑스의 왕비가 됩니다. 그녀는 18살에 52살이었던 루이 12세와 결혼했죠. 재미난 것은 메리 튜더가 프랑스 국왕과 결혼하면서 데려간 시녀들중에 앤 불린과 메리 불린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메리 튜더가 결혼한지 석달만에 루이 12세는 사망했고,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합니다.

메리 튜더는 이미 서퍽 공작이 되는 찰스 브랜든과 사랑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빠인 헨리 8세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구요. 결국 둘은 몰래 프랑스에서 결혼했지만, 메리 튜더가 영국으로 돌아온후 둘은 정식으로 국왕에게 결혼을 허락받습니다.

 

 

메리 튜더와 찰스 브랜든

 

메리 튜더와 찰스 브랜드의 자녀들중 큰딸인 레이디 프랜시스 브랜든은 도싯 후작인 헨리 그레이와 결혼해서 세명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중 큰 딸이 바로 레이디 제인 그레이입니다.

 

 

제인 그레이의 부모

헨리 그레이와 프랜시스 브랜든

 

어린시절부터 총명했다고 알려진 제인 그레이는 가문의 전통대로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됩니다. 튜더 가문은 여성들이 교육을 많이 받는것에 대해 자부심이 강했는데, 헨리 8세도 아내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학식이 뛰어나다고 늘 자랑했었으며, 나중에 부인들과 헤어진 후에도 딸들에게는 매우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제인 그레이의 부모는 처음에는 딸을 왕비로 만들길 원했습니다. 우선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캐서린 파에게 제인 그레이의 교육을 시켰죠.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죽은후 토마스 시무어 경과 재혼했습니다. 그는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이기도했죠. 하지만 권력을 손에 쥐고 있던 에드워드 6세의 외삼촌이자 토마스 시무어 경의 형이었던 에드워드 시무어 경은 프랑스나 합스부르크가에서 왕비를 얻길 원했습니다.

캐서린 파가 아이를 낳다 죽자, 제인 그레이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옵니다. 토마스 시무어는 권력에 대한 야심이 있었고, 이미 이전에 헨리 8세의 딸인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댄 전력이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와의 관계때문에 의회의 조사를 받아야했을 정도였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

 

시무어 가문 사람들이 몰락한후, 노섬벌랜드 공작인 존 더들리가 실권을 잡자 제인 그레이의 부모는 그와 연합을 하기로 합니다.

 

에드워드 6세가 죽어가고 있자, 존 더들리는 다음 계승자인 메리가 왕위를 잇는것에 크게 걱정합니다. 결국 그는 왕위계승권을 가진 제인 그레이와 자신의 아들을 결혼시켜서 제인에게 왕위를 잇게 하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제인 그레이는 1553년 존 더들리의 막내 아들인 길퍼드 더들리와 결혼합니다. (그는 로버트 더들리의 동생입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6세는 죽어가면서 유언으로 제인 그레이를 왕위계승자로 지목하죠.

이것은 헨리 8세가 정한 왕위계승법에 어긋나는것이었습니다. 헨리 8세는 외국인과 결혼한 누나 마거릿 튜더의 자손들은 왕위계승권에 배제했지만, 동생 메리 튜더의 후손들에게는 왕위계승권을 인정했습니다. 이때문에 제인 그레이 역시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죠. 하지만 헨리 8세는 자신의 자녀들을 가장 우선순위로 뒀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인 에드워드 6세가 자손없이 죽으면 다음은 큰딸인 메리가 뒤를 잇고 메리가 후손없이 죽으면 그 뒤에 엘리자베스가 왕위를 잇고 엘리자베스에게도 후손이 없을 경우 메리 튜더의 후손들이 왕위를 잇도록 했죠.

 

 

길퍼드 더들리

제인 그레이의 남편

로버트 더들리의 동생

 

에드워드 6세가 죽은후 제인 그레이는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선포됩니다. 하지만 메리가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뺏길수 없었죠. 여기에 메리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도 역시 메리를 지지합니다. 비록 동생인 에드워드 6세와 친한 사이긴 했지만, 제인 그레이가 여왕이 되는것은 자신의 권리도 뺏기는것이기 때문이었죠.

 

존 더들리는 제인 그레이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했지만, 메리가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자 의회역시 메리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결국 메리가 런던으로 입성하므로써 제인 그레이는 여왕이 된지 겨우 9일만에 붙잡히는 신세가 되죠.

 

 

제인 그레이의 시아버지

존 더들리

로버트 더들리의 아버지

 

제인 그레이와 더들리 가문 사람들은 모두 런던탑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의 어머니인 프랜시스는 메리 여왕이 좋아하던 친척중 한명이었습니다. 프랜시스와 메리 튜더는 앤 불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메리와 메리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캐서린에게 동정적이었기 때문이죠. 메리 여왕은 사촌과 그 가족을 적당히 용서해주었고, 비록 런던탑에 갇혀 사형 선고를 받긴 했지만,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남편은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제인 그레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당시 영국 귀족들은 메리 여왕이 잉글랜드 귀족과 결혼하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여왕은 스페인의 국왕인 펠리페2세와 결혼하려 합니다. 이에 대해서 많은 잉글랜드 귀족들이 반발을 했는데, 어떤 이는 이 혼담에 대해서 스페인 대사의 농간이라고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와이엇의 반란이 일어납니다. 여기에 많은 신교 귀족들이 참가했고 제인 그레이의 아버지 역시 반란에 참가했죠. 하지만 반란은 진압되었습니다. 이 반란때문에 메리 여왕은 많은 친척들을 의심했으며 그중에는 이미 감정이 나빠질대로 나빠져있던 동생 엘리자베스도 있었습니다.

 

이 반란 이후 메리 여왕은 부담 스러웠던 존재인 제인 그레이를 처형하기로 합니다. 펠리페 2세가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고 합니다. 와이엇이 체포된지 5일후 제인 그레이와 그녀의 남편은 런던탑에서 처형됩니다.

 

 

제인 그레이의 죽음

 

 

제인 그레이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