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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5) 메리 1세 : 블러디 메리

엘아라 2011. 6. 2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잉글랜드의 첫번째 여왕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예전에 튜더 왕가와 스튜어트 왕가에 대해서 잠깐 열심히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게 어떨결에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드라마인 the virgin Queen을 보고나서 필이 꽂혔었거든요.

아하하...그땐 나름 머리 깨져가면서 읽었는데 지금 기억하니 남은것이 없군요...ㅠ.ㅠ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5) 메리 1세 : 블러디 메리

 

잉글랜드의 공식적인 첫 여왕은 헨리 8세의 딸인 메리 1세입니다. 메리 1세는 어린시절은 행복했지만, 아들을 원한 아버지의 이혼때문에 불운한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신교에 대한 박해가 심했죠.

 

잉글랜드의 메리 공주는 헨리 8세와 그의 첫번째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유명한 아라곤의 페르디난트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의 막내딸이었습니다. 캐서린의 언니 후아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막시밀리안1세의 아들인 필리프와 결혼했죠. 이때문에 후아나의 아들인 카를은 할아버지로부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지위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를, 할머니와 아버지 필리프로부터 유럽 최고의 알짜 지역인 부르고뉴 지역을, 그리고 어머니로부터는 스페인과 그에 따른 신대륙 모두를 상속받게 되죠. 캐서린은 이런 막강한 가문의 딸이었고, 이후 헨리 8세가 이혼할때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것이죠.

 

 

메리 여왕의 부모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드라마 "튜더스"보고 좀 아니었던 점중 하나가 캐서린이 검은 머리로 나오는것입니다.

스페인 사람이라서 검은 머리의 여성으로 나온듯한데 사실 캐서린은 금발머리였다고 합니다. 젊은시절에는 꽤나 예버서 시아버지인 헨리 7세가 며느리를 처음보고 미모에 매우 만족해하면서 초상화를 그리도록했다고 합니다.

 

원래 메리의 어머니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수였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형인 아서가 결혼한 다음해 죽은후, 여러가지 외교 문제와 지참금 문제가 얽히고 섥힌결과 캐서린은 시동생인 헨리와 결혼하게 됩니다.

 

 

캐서린의 첫번째 남편

아서 왕자

 

메리는 부모의 유일한 자녀가 됩니다. 캐서린은 여섯아이를 낳았지만, 살아남은 아이는 메리밖에 없었죠. 헨리 8세는 딸을 무척이나 아꼈지만,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을 계속원했습니다. 그는 점점 아내에게서 멀어져서 이여자 저여자 사이에서 연애질을 했습니다. 그리고 앤 불린이 나타나면서 둘의 결혼은 끝나게 되죠.

 

부모의 사이가 끝나기전 메리는 유일한 아이로 헨리 8세가 무척 사랑하는 딸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서 아들을 얻을수 없게 되었을대, 결국 딸인 메리를 후계자로 둘 계획을 세웁니다. 그중 하나가 딸에게 Princess of Wales칭호를 부여하는 것이었죠. 잉글랜드의 제1 왕위계승자들은 전통적으로 Prince of Wales칭호를 썼는데, 딸을 공식 여왕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칭호를 쓰게 하려한것입니다. 궁정 사람들은 이 칭호를 썼지만, 사실상 공식적으로는 쓸수가 없는 칭호였습니다.

헨리 8세는 딸을 유럽의 유력한 왕가로 시집보내고 싶어했습니다. 딸의 사촌인 카를 5세나 프랑수아 1세의 아들인 도팽(프랑수아, 브르타뉴공작)이나 후에는 프랑수아 1세와 결혼시키려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도는 앤 불린과의 결혼이후 무위로 돌아갑니다.

 

 

소녀시절의 메리

이것은 카를 5세와 약혼했던 시기때쯤이라고 합니다.

 

 

헨리8세는 아내와 이혼을 원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카톨릭의 수호자였던 합스부르크가 출신의 카를 5세는 이를 찬성하지 않습니다. 카를 5세는 캐서린의 언니 후아나의 아들로, 이모가 이혼당하는것을 두고만 보지 않았죠.

 

우여곡절 끝에 헨리 8세는 아내를 쫓아내고, 앤불린과 결혼합니다. 이때 메리의 지위는 매우 불안정했는데, 이혼직전에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고,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결혼을 무효로 돌리는 바람에 메리는 "사생아"가 되어버립니다. 이전 Princess였지만 이후에는 Lady로 불리죠. 이것은 10대 후반의 혼기가 찼던 메리에게 큰 타격이 됩니다. 혼담은 끊어졌으며, 메리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를 입습니다. 게다가 앤 불린은 자신에게 굽히지 않는 메리의 기를 죽이기 위해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메리를 쓰기도 합니다. 이런 시도는 후에 메리가 여동생이자 후계자가 될 엘리자베스를 인정하지 않고 핍박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죠.

 

 

앤 불린

 

앤 불린이 처형당하고, 제인 시무어가 왕비가 된후, 메리의 처지는 좀 나아집니다. 제인 시무어는 남편과 메리사이를 중재하고 화해하도록 노력하죠. 이후 메리는 적자로써 인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국왕의 딸로써 어느정도 예우를 받게 됩니다. 이를테면 왕비가 없는 곳에서 메리는 가장 높은 신분의 여성으로 파티를 주최하는등의 일을 하죠.

헨리 8세의 마지막 부인인 캐서린 파는 남편과 전처 자식들을 화해시키고 왕실가족들을 가족으로 함께하게 하려 노력했습니다. 그결과 헨리 8세는 딸들을 적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실제적으로 자신의 딸임을 인정하고 아들 에드워드 다음의 왕위계승자로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지정합니다.

 

 

헨리 8세와 가족들

가운데 있는 여성은 제인 시무어이고 곁은 그렇게원하던 아들 에드워드입니다

왼쪽은 메리 오른쪽은 엘리자베스입니다.

 

아버지가 죽은뒤 메리는 동생인 에드워드가 즉위했지만, 궁정에는 거의 출입하지 않고 자신의 영지에만 머무르게 됩니다. 그녀는 카톨릭 믿음을 고수했고, 신교를 거부했기 때문에 화합하기 힘들었죠.

 

동생이 죽고 난 뒤, 노섬벌랜드 공작이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추대합니다. 이는 메리의 권리를 침해한것이었죠. 메리는 즉시 런던으로 가고, 사람들은 권력에 눈이 어두울뿐 명분이 약했던 노섬벌랜드 공작과 레이디 제인 그레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합니다. 메리의 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언니를 지지합니다. 왜냐면 제인 그레이가 즉위하는것은 엘리자베스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메리는 여왕으로 즉위하면서 여러가지로 신경을 쓰게 됩니다. 왜냐면 자신이 잉글랜드에서 첫 여왕칭호를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죠. 전례가 없었기에 여러가지가 문제 될수 있어서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여왕이 되기전의 20대 후반의 메리 여왕

어린시절 "아름다웠다"는 평판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이리저리 휩쓸리고 혼기를 놓쳐버립니다.

 

37살의 여왕이 된 메리는 서둘러 남편감을 찾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추정 왕위계승자가 여동생인 엘리자베스라는 것을 견딜수 없어했죠. 자신이 후계자를 낳는다면 엘리자베스에게 더이상 왕위계승의 희망을 없을테니 서둘러 남편감을 구합니다. 잉글랜드 귀족들은 자신의 첫 여왕이 당연히 잉글랜드의 고위 귀족과 결혼할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대부분의 여왕들은 남편과 공동통치자가 되는 것이 관례였고, 외국의 왕자와 여왕이 결혼한다면 잘못하면 잉글랜드가 외국 세력이 지배를 받게 될수도 있었습니다.

이때 메리 여왕에게 사촌인 카를 5세가 접근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인 펠리페를 메리의 남편감으로 추천합니다. 펠리페에게는 이미 후계자(돈 카를로스)가 있었기 때문에, 메리에게서 자녀가 태어난다고 해도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분리가 되어 상속될 수 있다는 논리였죠. 이때 펠리페의 나이는 28살로 메리보다 아홉살이나 어렸습니다. 후에 이들의 결혼에 대해서 "노파와 젊은이의 결혼"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메리는 펠리페에게 첫눈에 사랑에 빠졌고 그와 결혼하기로 하죠. 이는 잉글랜드 귀족들에게 엄청나게 경악스러운 일이었는데 심지어 동시대 인물중 하나는 스페인 대사의 농간이라고 분개하는 글을 쓸 정도였습니다.

 

 

프라도 박물관에 있는 펠리페 2세의 전신 초상화

 

의회는 스페인의 전쟁에 잉글랜드가 끌려들어갈까봐 두려워했고, 펠리페와의 결혼을 반대합니다. 하지만 여왕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비록 펠리페와 메리가 잉글랜드를 공동통치하지만 스페인의 정책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독립된 국가로 행동하겠다는 맹세를 받은후에 결혼을 승인합니다만 뭐 그 결과는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메리는 남편 펠리페를 너무나 사랑했고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기꺼기 스페인의 전쟁에 동참합니다. 그결과 메리는 대륙에 남아있던 잉글랜드의 마지막 영토인 칼레를 뺏앗겼고, 이것은 이후 메리와 펠리페가 더 인기없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됩니다.

 

펠리페와 메리

 

메리는 결혼 초기 임신의 징조가 보입니다. 모두들 기뻐했지만, 결국 해산날짜가 지나도록 아무 소식이 없자 임신이 아니라고 판단되죠. 이런 일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있었는데 아마도 메리가 아이 갖는것을 너무나 열망해서 생긴 "상상임신"이라고 여겨진다고 합니다. 펠리페는 아내가 임신한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자 군대와 함께 플랑드르로 가버립니다. 그러자 메리는 매우 우울하게 여기죠.

펠리페는 아내에게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대해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아내가 죽은후 잉글랜드의 계승권이 혹시나 프랑스의 도팽과 결혼한 메리 스튜어트에게 갈까봐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메리는 남편의 걱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동생인 엘리자베스가 어떻게든 계승하지 못하게하려는 꼬투리를 찾고 있었죠. 메리는 남편의 강권에 마지 못해서 동생에게 혼처를 소개하기도 했지만, 처제를 자기쪽 사람과 결혼시켜서 후계자를 얻으려는 남편과 달리 동생을 결혼시키는데 그다지 열성적이지도 않았습니다.

 

 

메리 여왕

 

메리는 카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에 퍼트리는데 열성적이었습니다. 그녀는 신교를 엄청나게 박해했는데 수많은 신교 목사들이 옛날식 전통으로 끔찍하게 화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카톨릭에 대한 반발을 전 잉글랜드에 부추기게 되었고 많은 이들이 메리 여왕에게 실망하고 등 돌리는 계기가 됩니다. 아마도 메리 여왕의 이런 잔혹한 행위는 이후 시대에 잉글랜드 의회의 카톨릭 박해로 이어지게 되는듯합니다. 의회는 카톨릭에 대해 철저하게 차별대우를 했으며, 이런 차별대우는 스튜어트 왕가가 들어선후에도 계속되었고, 이때문에 오랜 신교와 구교의 갈등은 잉글랜드 오래도록 이어졌고 결국 청교도 혁명 같은 내전이나 명예혁명같은 일을 일어나게 하기도 합니다.

 

 

 

메리 여왕

 

1557년 메리는 또 임신했다고 여깁니다. 그녀는 동생인 엘리자베스를 정식 계승자로 세우라는 요구를 후계자를 낳을것이라는 이유로 묵살하려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임신은 아니었고 결국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인정할수 밖에 없게 됩니다.

다음해인 1558년 메리는 고통속에서 사망하는데 병명은 자궁암이나 난소암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메리 여왕

 

재미난것은 생전에 그렇게나 동생을 싫어했지만, 죽은 후에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묻혀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