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두번째로 할 사람은 바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입니다.
제가 원래는 레이디 마거릿이 아니라 증조할머니인 캐서린 스윈포드에 대해서 좀 관심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캐서린 스윈포드 전기를 찾기가 힘들어서 얼떨결에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전기를 읽게 되었답니다. 그후에 좀 관심이 많이 가더라구요...아하하...
물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여왕이 된것은 아닙니다만, 그녀의 아들인 헨리7세는 어머니를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후계자로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영주로 가솔들을 이끌었으며, 아들 헨리를 왕위에 올리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왕이 된후에는 국왕의 모후로 최고의 권력을 누렸습니다. 평생 Queen이라는 칭호는 얻지 못했지만, Queen이었던 며느리인 요크의 엘리자베스와는 비교도 안되는 권력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에 대해서 이미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그냥 그글을 다시 정리합니다.-0-;;
잉글랜드의 여성 왕위 계승자들(2)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먼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Lady Margaret Beaufort
(May 31, 1443 – June 29, 1509)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지와 세번의 결혼을 통한 상속으로 레이디 마거릿은 대영주였습니다.
(이런 여성 대 영주들은 중세 영국 사회와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랭카스터 가문의 분가인 보퍼트 가문 출신으로, 그녀는 랭카스터 공작 곤트의 존과 캐서린 스윈포드의 장남인 존 보퍼트의 손녀로 태어났습니다.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왕가와 가장 가까운 혈연관계로 랭카스터 공작과 첫번째부인인 블랜치 사이의 후손이 모두 사망하자 그 다음으로 왕위계승권을 가지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아버지인 존 보퍼트는 100년전쟁중 프랑스의 포로로 오래도록 억류되어있었습니다. 그는 100년전쟁중 프랑스에 잡힌 영국 귀족중 제일 신분이 높은 인물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는 보퍼트가문 출신으로 국왕 헨리 4세의 조카였을뿐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 홀랜드는 헨리 5세의 막내 동생인 랭카스터의 토마스와 재혼했기때문이었죠. 몸값을 내고 석방된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서머셋 공작이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2살때 아버지를 여의였고, 곧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됩니다. 때문에 그녀는 매우 부유했지만 불안정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나 그녀가 가진 재산과 지위때문이었죠. 비록 아버지의 서머셋 공작령을 물려받을수는 없었지만, 아버지의 재산은 모두 물려받았습니다. 게다가 랭카스터 가문의 직계후계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던 상황헤서 보퍼트 가문은 랭카스터 가문의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왕위계승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수도 있었죠.
레이디 마거릿이 7살때 그녀는 처음으로 약혼을 합니다. 그녀의 후견인이었던 서폭공작인 윌리엄 드 라 폴 은 레이디 마거릿의 재산때문에 마거릿을 자신의 아들인 존 드 라 폴과 약혼시킵니다. 하지만 이 약혼은 국왕의 명으로 깨집니다.
헨리6세
당시 헨리6세는 자녀가 없었기에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부 동생인 리치몬드의 백작 에드먼드 튜더와 레이디 마거릿을 결혼시킬 계획을 세웁니다. 왕의 동생이긴 하지만, 왕권과 전혀 관계없는 동생을 좀더 왕위계승권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시키려한것이죠. 이문제는 재미있는 문제로 보퍼트 가문이 헨리4세에 의해서 왕위계승권을 배제 당했던것과 정 반대의 의견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아마도 헨리6세때 보퍼트 가문의 계승권리를 완전히 인정한것이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헨리 6세의 이부 동생인 에드먼드 튜더는 헨리 6세의 어머니인 카트린느 드 발루아와 웨일즈 출신의 귀족이었던 오언 튜더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헨리 6세의 동생이긴 했지만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이 없었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어린시절 다른 중세 시대 여성보다 좀더 특별난 교육을 받습니다. 레이디 마거릿의 어머니 마거릿 보챔프는 교육에 대해서 좀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딸에게 당시 귀족여성이 필수 교양이었던 바느질이나 가솔들을 다스리는 법을 가르쳤던 한편, 읽고 쓰는법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성이었기에, 라틴어를 가르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학구적이었던 레이디 마거릿은 후에 스스로 라틴어를 독학했지만 (스스로 만족하기에는 ) 한참 모자란 실력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레이디 마거릿은 교육은 후에 튜더가문의 여성들이 매우 학구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기여합니다. 일례로 헨리8세는 자신의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매우 학식이 훌륭하다는것을 자랑스러워했고, 이혼등으로 혼란한 지위가 되었던 딸들에게 훌륭한 교육을 받게 했다고 합니다.
12살(우리나라 나이로 14살)의 나이에 마거릿은 25살에 에드먼드 튜더와 결혼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노년에 자신의 친구인 피셔주교에게 결혼하게 된 이야기를 이렇게 합니다."결혼을 결정해야했을때, '신뢰할수 있는 노부인'이 성 니콜라스에게 기도하라고 충고했고 그 충고에 따라 기도했고,성 니콜라스는 에드먼드와 결혼하라는 계시를 내렸소."
레이디 마거릿이 결혼한지 1년도 되지 않았을때, 남편인 에드문드 튜더는 사망합니다. 장미전쟁초기 그는 요크가에 포로가 되었는데, 그 직후 흑사병으로 사망습니다. 남편이 죽었을때 그녀는 임신중이었고 과부가 된지 석달후 마거릿은 유일한 아들을 낳게 됩니다. 레이디 마거릿이 더이상 아이를 낳을수 없게 된것은 아마도 너무 어린 나이에 출산을 했기 때문으로 추측합니다. 또 그녀는 출산을 너무나 끔찍한 경험으로 인식합니다.그래서 후에 손녀인 마거릿이 스코틀랜드 국왕과 혼담이 오갈때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레이디 마거릿은 왕위계승에서의 아들의 중요한 지위를 인식했고, 그때문에 아들의 이름을 아이 아버지나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르지 않고, 백부이자 왕들의 이름인 "헨리"라고 지었습니다.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 튜더의 무덤 위 장식
레이디 마거릿의 삶은 장미전쟁과 떼어놓을수 없습니다. 결혼하던 무렵부터 시작되었던 장미전쟁은 결국 마거릿의 아들이 종식시키게 되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이후 일이고 아들을 낳은 레이디 마거릿은 어린 과부였을뿐입니다. 그녀는 아들의 권리와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결혼해야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남자가 바로 버킹엄 공작의 아들인 헨리 스탯포드였습니다. 이 결혼은 마거릿에게 매우 중요한 결혼이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부터 부유했고 왕위계승권을 가진 상속녀로 정치적 문제에 연관되었던 그녀에게 헨리 스탯포드와의 결혼생활은 가정의 안정감을 느끼게 했던 생활이라고 합니다. 또 레이디 마거릿은 헨리 스탯포드와 결혼하면서 아들 헨리 튜더를 직접 양육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아버지를 잃은 귀족 아이가 다른 유력한 후견인의 손에 키워졌던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에게 자신과 같이 학구적인 교육을 받게 했을것이라고 추측할수 있습니다.
장미전쟁은 1460년경 절정을 향해 갑니다. 헨리6세는 군대를 지휘할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평가였지만, 그에게는 걸출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바로 앙주의 마거릿이었죠.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서 갑옷을 입고 군대를 지휘했습니다. 1460년경 요크공작 리처드가 자신은 아니지만 후손의 왕위계승권을 확보하게 되자, 왕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크가의 본거지로 쳐들어가서 요크 공작의 목을 벱니다.( 요크 공작의 머리에 종이 왕관을 씌워서 성문에 걸어놨다고 합니다. ) 하지만 이후 전쟁은 다시 요크가에게 유리하게 돌아갔고, 헨리6세의 후계자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고, 미친 국왕은 런던탑에서 살해당합니다. 1470년대가 되자 요크의 에드워드4세(요크공작 리처드와 시슬리 네빌-레이디 마거릿의 오촌으로 외할머니가 캐서린 스윈포드-의 아들)가 왕위를 얻게 되고, 랭카스터 가문에서는 더이상 남아있는 후계자가 없게 됩니다. 결국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인 헨리 튜더가 랭카스터 가문사람으로는 가장 가까운 왕위계승자인것을 깨닫고 안전을 위해 14살인 아들을 숙부인 재스퍼 튜더와 함께 멀리 외국으로 보냅니다.
헨리6세와 앙주의 마거릿
아들을 외국으로 보낸 직후, 레이디 마거릿은 또한번 남편을 잃게 됩니다. 이후 마거릿은 수도원의 수행자들처럼 거친옷을 입고 고행을 합니다. 하지만 요크가 치하의 랭카스터가문의 여성 대 영주에게는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했죠. 마거릿은 요크가의 신임을 얻고 있던 신하이자 후에 더비의 백작이 되는 토마스 스탠리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스탠리는 아내의 권리를 위해 에드워드4세에게 탄원했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토마스 스탠리
후에 1대 더비의 백작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자신의 재산과 영향력을 조금씩 행사해가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483년 에드워드4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4세는 동생 리처드에게 자신의 아들들을 부탁했지만, 리처드는 에드워드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사이의 결혼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는 형이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전 이미 다른 여성과 약혼했고, 당시는 약혼한것은 결혼한것과 동일시 되었던 시기였기에, 형의 아이들이 모두 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에드워드4세의 두 아들들이 런던탑에서 사라진직후, 리처드는 스스로 왕이 됩니다.
리처드3세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의 아들이 리처드3세만큼이나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음모를 꾸미죠. 제일먼저 포섭한 사람은 바로 남편인 토마스 스탠리였습니다. 그는 요크가의 총신이었지만, 리처드 3세는 자신의 암살음모에 그가 포함되어있다고 생각해서 그를 감옥으로 보냈다 풀어준적이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요크가에 대한 토마스 스탠리의 신뢰는 약화되었고, 결국 부인에게 동조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마거릿은 사촌의 아들이자 리처드3세의 최측근인 버킹엄공작을 끌어들입니다. 버킹엄 공작 역시 자신도 왕위계승자로 손색없다고 생각했지만, 레이디 마거릿은 아들 헨리 튜더의 왕위계승권이 더 정당하다고 주장하면서 대신 아들이 즉위한다면 그를 왕을 제외하고 영국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거릿은 가장 중요한 사람을 포섭합니다. 바로 전 왕비였던 엘리자베스 우드빌이었죠. 마거릿은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요크가의 공주를 왕비로 맞아서 왕위계승권을 확고하게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딸들과 함께 리처드3세를 피해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역권으로 도망가있는 상태였죠.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결국 레이디 마거릿과 뜻을 같이했고, 딸들중 한명(큰딸인 엘리자베스)와 헨리 튜더를 결혼시키기로 합의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헨리7세가 즉위한 몇년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고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궁정에서 떠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랭카스터가 가신의 부인으로 남편을 잃은뒤 에드워드4세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에드워드4세에게 "전 왕비가 되기에는 부족하지만, 정부로 남기에는 너무 훌륭합니다."라고 했다고합니다.
이 일이 성사되자 레이디 마거릿은 외국에 가있던 아들에게 기회가 왔다고 전합니다. 버킹엄공작이 반란을 주도할것이고, 튜더가문의 본거지인 웨일즈가 호응을 하고, 에드워드4세의 딸과 결혼하므로써 명분을 쌓는 확실한 계기인것이죠. 하지만 헨리 튜더는 영국 상륙에 실패했고, 반란은 진압당했으며 버킹엄공작은 처형당합니다. 또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딸들은 리처드3세의 설득(또는 강압)으로 성역권을 나와서, 딸들은 궁에 머물렀고 왕비 지위를 잃은 엘리자베스 우드빌은 유폐되었습니다. 리처드3세는 반란의 주도자였던 레이디 마거릿에게는 매우 관대한 처분을 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사권 박탈을 명했고(사권박탈당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해꼬지를 당해도 전혀 법의 보호를 받을수 없다고합니다.) 작은 비밀장소에 감금하도록합니다. 하지만 스탠리경에게 마거릿의 재산을 관리하도록 지시했으며, 레이디 마거릿에 대한 감독도 스탠리경이 했죠. 이런 관계는 장미전쟁이후 가족끼리도 서로 싸우는 관계였던적이 많기에 아마도 리처드 3세가 토마스 스탠리가 부인과 정치적으로 같은 노선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일겁니다.
이후 상황은 더 급박하게 전개 됩니다. 조카들을 호의적으로 대해주는 리처드3세에 대해서 국왕의 적들은 리처드3세가 (아픈)왕비를 독살하고 "fair Bessie"(요크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할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그리고 1485년 리처드3세의 병든 왕비가 죽자, 헨리 튜더와 그의 숙부인 재스퍼 튜더는 영국침공을 서두릅니다. 헨리 튜더가 영국에 상륙하자, 리처드3세는 스탠리경의 장남을 인질로 삼습니다. 하지만 스탠리경은 부인을 돕는것을 주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를 완전히 신뢰했으며, 부인의 계획이 성공하는것만이 자신의 장남을 구할길이라고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결국 헨리 튜더는 리처드3세를 상대로한 전투에서 승리했으며, 그는 영국의 국왕 헨리7세가 됩니다. 그리고 요크가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하면서 장미전쟁을 종식시킵니다.
헨리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둘은 각각 랭카스터 가문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와 요크가를 상징하는 흰장미를 들고 있죠.
헨리7세가 즉위한후, 그는 자신을 도와주고 이끈 어머니인 레이디 마거릿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감사를 했으며, 그녀가 독립적인 삶을 살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이미 중세의 다른 여성들과는 다르게 대 영주로써 남편에게 기대는 삶보다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을 하던 마거릿은 궁정에서도 굉장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아들인 헨리7세는 어머니를 늘 존중했다고합니다. (때문에 며느리인 요크의 엘리자베스는 시어머니의 그늘에 늘 가려있었다고 합니다. -또 시어머니보다 일찍사망합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후 레이디 마거릿은 자신이 추구했던 경건하고 학구적인 삶으로 돌아갈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피셔주교와 친구가 되었고, 여러곳에 종교 연구에 대한 서적들을 기부했다고 합니다. 특히나 캠브리지 대학의 두개의 칼리지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사람들이 성경에 더 쉽게 다가가게 하기 위해서 성경 봉독자의 자리를 기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문맹이 많아서 성경을 못읽으니 읽는 사람을 고용하게 한것이죠.) 또 외국의 논문들을 번역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레이디 마거릿는 아들보다 두달 더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강건한 손자인 헨리8세가 경건하고 독실한 스페인의 공주인 왕비와 함께 나라를 통치하리라 의심치 않고 죽었죠.^^*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는 재산과 권리때문에 여러번 결혼해야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리치몬드와 더비의 백작부인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고 독립적인 삶을 추구했기에,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라고 그대로 불리는것이 그녀에게 더 어울리는 호칭이 아닐까합니다.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
리치몬드와 더비의 백작부인
아들이 즉위한후 그녀를 호칭할때 "My lady the King's Mother"이라고 불렀다고합니다.
자료출처
1. Divorced,Beheaded,Survived (1995): 헨리8세의 여섯부인들에 대한 책
2. The King's Mother: Lady Margaret Beaufort - Countess Richmond and Deby
(레이디 마거릿 보퍼트전기)
3.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피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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