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영국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 (팔츠의 선제후비)

엘아라 2011. 5. 13. 23:46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또 팬서비스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사실 마르소 전기를 미친듯이 읽었더니 전쟁이야기에 신물이 납니다. (베르나도트 전기가 베르나도트 중심이라서 프랑스 혁명전쟁 상황을 모르겠다고 투덜댔더니, 마르소 전기는 방데 내전에 대해서 따로 떼내서 글을 써도 될 지경입니다...ㅠ.ㅠ)

어쨌든 데지레 클라리 전기를 읽으려다가, 또 프랑스 장군들 나올것 같아서 때려치웠습니다.--;;;

(흑...그래도 마르소 전기에서 클레베르와 만나는 부분까지는 읽어야하는데 말입니다..ㅠ.ㅠ)

 

오늘도 어떤 검색어로 제 블로그에 찾아오셨나를 살펴보니 딱 눈에 띄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뭐 다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도 있을겁니다만, 저의 머리에 떠오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5세(잉글랜드의 제임스1세)와 덴마크의 앤의 딸인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였습니다.

카톨릭쪽에서 그녀와 그녀의 남편 프리드리히에 대해 한해 겨울동안 보헤미아의 왕비와 왕으로 있을거라는 의미로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겨울 국왕"라고 불리기도 했는데 실제로 제위기간인 1여년밖에 안되어서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라는 칭호를 자주 쓰는듯합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팔츠의 선제후비

보헤미아의 겨울 왕비

Elizabeth of Scotland, Queen of Bohemia

(19 August 1596 – 13 February 1662)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5세와 그의 부인인 덴마크의 앤의 큰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태어났을때 아버지인 제임스 5세는 아직까지 잉글랜드의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엘리자베스1세가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여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목하지는 않았죠.

하지만 스코틀랜드의 제임스5세는 가장 유력한 잉글랜드 왕위계승후보자였습니다. 그는 부계와 모계 모두 헨리7세의 딸인 마거릿 스튜어트의 후손이었을뿐만 아니라, 당시 잉글랜드에 있던 다른 왕위계승후보자들은 모두 엘리자베스1세의 허락없이 결혼하는 바람에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했죠.

물론 헨리8세가 왕위계승자에 대한 순위를 적으면서 누나의 자녀들을 몽땅 빼긴했지만, 법적으로는 제임스 5세가 왕위계승자가 되는것에는 문제가 없어보였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부모

 제임스1세와 덴마크의 앤

잉글랜드에서 기반이 약했던 제임스1세는 작위를 마구 남발해서 신흥귀족들을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잘생겼던 시종무관들이나 침실 시종들이 포함되어있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그가 남자들을 좋아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는...(예전에 읽었던 전기에서는 어릴때부터 그랬다는데 뭐랄까 애정결핍이 아니었나 싶어요 태어난지 1년도 안되서 어머니랑 떨어졌잖아요.)

그런 신흥 귀족들중 유명한 인물중 하나가 버킹엄 공작인 조지 빌리어스입니다.

 

제임스 5세는 자신의 첫번째 딸이 태어나자, 아이의 이름을 엘리자베스1세의 이름을 따서 엘리자베스라고 짓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여섯살때 아버지가 잉글랜드의 국왕(제임스1세)가 되자 엘리자베스 역시 아버지를 따라 잉글랜드로 옮겨갑니다.

제임스1세가 잉글랜드로 옮겨간 시기의 정치는 그다지 안정되지 못했습니다.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국왕에 대해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제임스 1세 역시 잉글랜드에서는 정치적 입지가 약했습니다. 게다가 제임스1세가 신교이긴 했지만, 잉글랜드 보다 더 카톨릭에 열성적이었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국왕이 즉위하면서 신교측에서는 국왕이 다시 카톨릭을 권장할까 우려했고, 반대로 카톨릭측에서는 차별대우가 해소되길 바랬죠. 하지만 제임스1세는 이전 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려했기에, 카톨릭 교도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습니다. 카톨릭 교도의 음모중 하나는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를 납치한후 다른 왕족들은 모두 살해해서 그녀를 카톨릭 여왕으로 만들겠다는 음모도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음모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1603년의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엘리자베스가 결혼할 나이에 이르자 여러곳과 혼담이 오갔는데 그중에는 스웨덴의 국왕이었던 구스타프2세 아돌프도 있었으며, 팔츠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5세도 있었죠.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제임스1세는 딸에게 걸맞는 남편감을 구해주고 싶어했습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다스리는 국왕의 딸인 엘리자베스에게 걸맞는 남편감은 "King"정도가 되어야했죠. 그는 특히 프랑스의 루이 13세에게 딸을 보내고 싶어했습니다만, 엘리자베스가 카톨릭교도와 결혼하는것은 의회가 찬성하지 않을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럽쪽의 신교도들 역시 같은 신교도인 잉글랜드 국왕의 딸이 구교도인 프랑스 국왕과 결혼한다는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 5세는 서둘로 결혼협상을 진행시켰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인 앤 왕비는 이 결혼을 반대했지만, 결국 1613년 2월 프리드리히 5세가 잉글랜드로 와서 둘은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은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매우 행복했고 나중에 어려운 처지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팔츠그라프령이 비텔스바흐가문으로 넘어간것은 13세기경입니다. 그리고 팔츠 선제후 칭호를 가진것은 14세기경이구요. 어쨌든 팔츠 가문도 바이에른 공작가문과 같은 비텔스바흐 가문으로 머나먼 친척관계입니다.

1619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국왕으로 선출되었고 이를 수락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후 30년전쟁의 시작이 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도 그렇지만, 보헤미아의 국왕 자리 역시 귀족들의 투표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세습되는것이나 다름없었죠. 바로 합스부르크가의 후계자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국왕이 되었죠. 합스부르크가가 보헤미아를 얻은 것은 유명한 결혼정책때문이었는데. 막시밀리안 1세가 자신의 손자와 손녀를 각각 헝가리 보헤미아의 공주와 후계자와 결혼시켰고, 이 덕분에 합스부르크가가 보헤미아도 손에 넣게 됐습니다. 하여튼 당시 합스부르크가의 후계자가 될 페르디난트는 매우 열성적인 카톨릭 교도로 신교에 대해 억압적 정책을 펼것이 분명했습니다. 보헤미아의 신교 귀족들은 이를 매우 걱정했고, 신교출신의 유력한 인물을 국왕으로 선출하기로 결심했죠.

프리드리히와 엘리자베스는 왕과 왕비로 보헤미아로 갔지만, 프리드리히의 치세는 매우 짧았습니다.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를 공격했고, 둘은 겨우 한해 정도 동안만 왕과 왕비로 지냈고 프리드리히의 치세는 겨울이 시작할때 쯤 시작해서 다음해 겨울이 시작될때쯤 끝나게 되죠.

 

엘리자베스

 

둘은 간신히 목숨만 건져서 네덜란드로 도망쳤고, 아이들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미 팔츠 선제후령 역시 카톨릭군에 의해 장악되었기 때문이었죠. 게다가 1632년 프리드리히는 망명지에서 사망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궁핍한 생활을 했는데, 아들인 카를 루드비히가 아버지의 팔츠 선제후령을 찾을때까지 이런 궁핍한 생활을 했습니다. 1648년 카를 루드비히는 아버지의 선제후령을 되찾았고 다시 팔츠의 선제후가 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아들 곁으로 가지 않고 계속 네덜란드에서 살았습니다.

1649년 동생 찰스1세가 청교도 혁명으로 처형당한것은 엘리자베스에게도 큰 충격이었을것입니다.

 

1660년 잉글랜드에서 왕정이 복고 되면서 조카인 찰스2세가 즉위하자, 엘리자베스는 조카가 있는 잉글랜드로 갔고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아들이자 팔츠의 선제후인 카를 루드비히에게는 엘리자베스 샤를로트라는 딸이 있었습니다. 애칭으로는 리젤로트라고 불렸죠. 그녀는 프랑스에 살던 숙부의 주선으로 프랑스 왕실로 시집갑니다.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둘째 부인이되죠. 그리고 리젤로트의 "잘생긴"외손자인 프랑츠 슈테판은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자 합스부르크가의 후계자가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합니다.

또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막내딸인 조피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후에 하노버 선제후가 되었고, 조피 역시 하노버의 선제후비가 되죠. 후에 잉글랜드에서 명예혁명이 일어나면서 카톨릭이 잉글랜드 왕위계승자가 될수 없다는 조항이 들어가면서,조피와 그녀의 후손들은 왕위계승자로 유력해집니다. 잉글랜드의 앤여왕이 조피보다 미리 죽었다면 아마 조피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여왕으로 선포되었을것입니다만, 그전에 미리 죽었습니다. 그때문에 아들인 하노버의 선제후 게오르그 루드비히가 국왕이 되죠. 그가 바로 영국의 조지1세입니다. 조지 1세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아들은 조지1세의 뒤를 이은 조지2세였고, 딸은 프로이센 왕비가 되죠.

이런 관계로 엘리자베스 스튜어트는 전 유럽 왕가의 선조가 됩니다. ^^*

 

 

엘리자베스의 유명한 후손들

위의 두명은 팔츠의 선제후 카를1세와 그의 딸인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리자베스 샤를로트

아래 두명은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와 그녀의 아들인 영국의 조지1세입니다.

엘리자베스는 엘리자베스 샤를로트를 통해 오를레앙가문,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탈리아등 구교 왕가의 선조가 되고, 조지1세를 통해서는 영국,프로이센,덴마크,스웨덴등 신교 왕가의 선조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