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왕자 결혼 특집] 영국 왕실의 결혼...베아트리스 공주 :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인 베아트리스 공주는 언제나 어머니에게 얽매여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이 죽을때 이미 결정된것이었다. 여왕은 남편이 죽은후 홀로 되는것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남편 앨버트 공이 죽기 직전 여왕은 많은 주변 사람들을 잃었다. 어머니 켄트공작부인, 외삼촌인 레오폴1세, 어린시절 지지자이자 가정교사였던 레첸 등등을 잃은 후 여왕은 자신의 의지처였던 남편 앨버트 공을 잃었다.
남편을 잃은 충격은 여왕의 삶을 우울함에 빠져들게 만들었고, 자녀들이나 궁정 조신들이나 친척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편을 잃은 여왕을 처음 돌봤던 사람은 여왕의 둘째딸인 앨리스 공주였다. 공주는 여왕의 곁에서 잠을 잤으며 늘 어머니를 돌봤다. 앨리스가 결혼한 뒤는 헬레나가 그 역할을 떠맡았고, 헬레나가 결혼한 뒤에는 루이즈가 그 역할을 떠맡았다.
베아트리스는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와 늘 함께했다. 영국 왕실 가족들은 베아트리스를 어머니의 부속물 같은 존재로 여겼으며, 여왕에게서 그녀를 떼어놓을 엄두는 절대 내지 못했다. 여왕은 베아트리스를 완전히 움켜쥐고 놓지 않았다.
엄마한테 붙잡혀서 평생 살아야했던 베아트리스 공주와 딸을 죽어라 안 놔준 엄마 빅토리아 여왕
이렇게 엄마한테 붙잡혀 산 공주들이 좀 있습니다.=0-;;;
베아트리스가 견진성사를 받을 무렵, 여왕은 딸의 견진성사를 어떻게든 늦추려했다. 여왕의 이런 노력은 빅토리아 여왕 가족들에게 견진성사란 곧 "결혼할 나이에 이르렀다"라는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었다. 여왕은 베아트리스의 견진성사에 대해 절대 결혼을 위한 의식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 여왕은 베아트리스에게 자신을 돌보는것은 사명이라는 생각을 마구 불어넣었으며, 결혼이라던가 독립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하도록 딸에게 압력을 가했다. 여왕은 딸이 보는 책까지도 간섭했다.
베아트리스는 점점 나이들어갔으며 언니 오빠들은 이미 다 결혼햇고, 조카들이 결혼하는 시점에서도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왕실 가족 대부분은 베아트리스가 결혼하기 힘들것이라 여겼으며 여왕의 곁에서 평생 시중을 들다가 살것으로 여겼다. 특히 여왕의 의지는 확고했는데 24살의 딸에대해 "결혼이나 아내가 되는 일을 겪기에는 너무 어리다"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하지만 여왕이 이 이야기를 썼을때 여왕의 막내며느리가 된 발덱-피르몬트의 헬레나는 베아트리스보다 어렸다.--;;;
나름 예뻤던때의 베아트리스
10대후반 또는 20대 초반
사실 베아트리스에게도 몇번의 혼담 비슷한것이 있었다. 제일 먼저는 나폴레옹3세의 아들이었던 프린스 임페리얼이었다. 그와 베아트리스가 사랑에 빠졌다던가, 베아트리스와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상당히 오래동안 퍼졌지만, 외제니 황후가 베아트리스를 며느리 삼고 싶어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프린스 임페리얼이 죽을 당시까지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를 그와 결혼시킬 마음이 없었다.두번째는 형부인 헤센의 대공과의 혼담이었다. 여왕은 이상하게도 이 혼담은 지지했는데 불행히도 영국 법률에서는 죽은 부인의 자매와 결혼을 금지하고 있었고 왕실에서 이것을 개정하려고 노력했었지만, 베아트리스가 아주 나이들때까지 이 법률은 존속되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 남편의 형들인 바텐베르크 가문의 아들들과 혼담도 있었다고 추측된다.
모두들 베아트리스가 결혼하지 않을것이라고 여겼던 그때, 베아트리스는 사랑에 빠졌다. 베아트리스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였다. 베아트리스는 그를 조카인 헤센의 빅토리아의 결혼식에서 처음 만났다. 헤센의 빅토리아는 바텐베르크의 루드비히와 결혼했으며, 하인리히는 빅토리아의 시동생이었다. 베아트리스와 하인리히는 첫눈에 사랑에 빠졌으며 베아트리스는 그와 결혼하겠다고 여왕에게 말했다. 이는 여왕에게 매우 큰 충격이었는데 절대 자신곁에만 있을줄 알았던 딸이 느닷없이 결혼하겠다고 선언한것기 때문이다. 여왕은 격노했고, 모녀지간에 몇달간 대화가 없었고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 여왕은 딸에게 쪽지로 대화했다.(이는 여왕이 격노했을때 남편 앨버트공이 부인과 의사소통을 하던 방식이었다.)
여왕의 며느리들인 웨일즈 공비와 큰언니이자 대모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가 여왕과 베아트리스 사이를 중재했고 여왕은 하인리히가 모든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곁에서 베아트리스와 함께 산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영국에서는 헨리로 불렸습니다. 그는 유명한 바텐베르크 가문 사람입니다.
그는 베아트리스보다 한살 어렸습니다. 게다가 베아트리스는 그의 형수인 헤센의 빅토리아의 이모였기때문에 족보 무진장 꼬입니다. (베아트리스는 결혼후에 조카보고 이제 sister라고 부르자라고 말했지만, 빅토리아가 싫다고 했습니다.)
베아트리스와 하인리히의 결혼이 결정되자, 여왕은 그 상황을 좋아하게 되었다. 딸을 잃는것이 아니라 덤으로 사위까지 얻은것이기 때문이었다. 여왕은 잘생긴 사위를 좋아했으며, 막내 사위의 출신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 프로이센 사돈(아우구스타 황후)와 사위(프리츠)에 대해 화를 냈다. (바텐베르크 가문은 귀천상혼한 가문 출신이라 당시 유럽 왕가에서는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었습니다.바텐베르크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저의 앞쪽 포스트인 19세기 유럽의 신데렐라...율리아 폰 후케(바텐베르크 공비) 를 참조해주세요.)
베아트리스의 결혼은 1885년 7월 26인 오스본 근처 휩핑햄의 세인트 밀드레드 교회에서 열렸다. 왕실 공주의 결혼식은 교구 교회에서 하지 않는것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베아트리스의 결혼은 공식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했다.
베아트리스 신부 들러리들은 모두 열명으로 모두 신부 조카들이었다.
웨일즈 공의 딸들인 웨일즈의 루이즈,빅토리아,모드, 앨리스 공주의 딸들인 헤센의 이레네와 알릭스(여왕은 앨리스라고 쓰시는군요), 헬레나 공주의 두 딸들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헬레나 빅토리아와 마리 루이즈, 에든버러 공작의 세딸들인 에든버러의 마리, 빅토리아, 알렉산드라였다.이중 웨일즈의 모드는 노르웨이의 왕비가 되었고,헤센의 알릭스는 러시아의 황후가 되었으며, 에든버러의 마리는 루마니아의 왕비가 되었다. 재미난 사실은 이들의 사촌이자 베아트리스의 딸인 에나는 스페인의 왕비가 된다. 신부들러리들은 모두 높은 깃의 팔랑거리는 스커트의 흰색 드레스를 입었다.
베스트맨은 신랑의 형과 동생인 바텐베르크의 알렉산더와 프란츠 요제프였다.
신부인 베아트리스는 빅토리아 여왕이 "매우 단순하다"라고 언급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이 드레스는 베아트리스 공주의 몸에 딱 붙는 스타일의 흰 새틴으로, 여기에 화려한 레이스와 오렌지 꽃, 머틀, 흰 야생화로 장식되어있었다. 공주의 베일은 빅토리아 여왕이 결혼식때 쓴 호니턴베일이었다. 여왕은 이 특별한 베일을 아이들 세례식때 쓰긴했지만, 아무에게도 빌려주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머리에는 다이아몬드 별이 달린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썼으며 그 위를 오렌지 꽃으로 장식했다. 목에는 다이아몬드 십자가가 달린 짧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했다. 왼쪽 어깨에는 빅토리아 앤 앨버트 훈장과 크라운 오브 인디아의 제국 훈장을 달았다.
신랑인 하인리히는 결혼직전까지 근무했었던 프로이센 왕실 호위대의 의전용 군복을 입었다. 그는 베아트리스와 결혼하면서 군대 경력을 포기해야했다. 흰색의 상의에 흰색 허리띠를 했으며 딱 달라붙는 바지에 무릎까지 오는 검은색 부츠를 신었다. 켄터베리 대주교와 다른 세명의 성직자들이 작은 교구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집전했는데 이런 결혼식 풍경은 흰색의 옷을 입은 신랑을 아주 낭만적으로 보이게 했으며, 이때문에 웨일즈 공비 알렉산드라는 하인리히에 대해 "베아트리스의 로엔그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알렉산드라 왕비가 좀 소녀취향이십니다.-0-;;)
신부 들러리와 베스트맨과 함께 있는 베아트리스 공주 부부
공주부부옆의 앞쪽 세명의 소녀는 에든버러 공작의 딸들인 빅토리아 멜리타,마리,알렉산드라입니다.
그뒤의 세명은 웨일즈의 모드,헤센의 알릭스,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헬레나 빅토리아
그 뒤로 네명은 웨일즈의 루이즈,헤센의 이레네,웨일즈의 빅토리아 알렉산드라,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마리 루이즈입니다. (모두 왼쪽에서 기준으로)
남자 두명 중 왼쪽은 신랑 형인 알렉산더, 오른쪽은 신랑 동생인 프란츠 요제프입니다.
결혼후 베아트리스의 삶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어머니의 비서로 어머니 곁에 있었다. 아이들이 태어난후에는 하인리히는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공처럼 아이들의 교육에 집중을 했다.빅토리아 여왕은 딸고 사위와 함께 살면서 매우 즐거워했으며, 이때의 궁정은 앨버트공이 죽은 이후 가장 즐거웠던때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하인리히는 장모와 아내 곁에서 아무일 없이 빈둥대면서 살아가는것을 매우 지겨워했으며 견디기 힘들때는 요트를 타고 자주 여행을 나섰다. 그리고 그는 보어 전쟁이 장기화 되자 아내와 장모를 설득해서 전쟁에 참전한다. 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가던 도중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자료출처
The Last Princess : the Devoted life of Queen Victoria's Youngest Daughter (2008.Matthew Dennison) :베아트리스 공주 전기 (이거 읽다가 만연체때문에 성격 버릴판이라는..--;;)
그림출처
1.위키피디어
2.플릭커 중 Mg_R님의 사진중 Fawbert's Royal file
http://www.flickr.com/photos/fawbs/sets/72157612898871013/with/555220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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