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러시아 황실 가족의 최후와 뒷이야기...(4) 두번째 유해 발굴

엘아라 2011. 1. 21. 06:00

 

 

 

 

러시아 황실가족들의 최후와 뒷이야기.. 두번째 유해발굴

 

첫번째 유해 발굴이후 많은 사건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칭자들이 가짜로 여겨졌으며 특히 DNA검사법은 막강했다. 이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DNA검사법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처음에 했던 검사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DNA검사를 인정했다. 안나 앤더슨이 여대공이라고 책을 썼던 한 사람은 개정판을 내면서 DNA검사 파트를 덧붙이면서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했다. 여전히 안나 앤더슨이 맞다고 주장하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DNA검사 결과가 다르다라는 대답이 따라왔다.

 

유해가 두구가 비었기에 아직까지 생존에 대한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제까지의 사칭자들에 대해서는 거의 잊어갔다. 한편으로는 수많은 다른 황실 추종자들은 남은 두구의 유해를 찾기 위해 예카테린부르크 주변을 샅샅히 파헤치고 있었다. 어느 황실 추종자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서 수년째 남은 유해를 찾고 있기도 했다. 그들에게 아직까지 짜르는 자신들의 황제였다.

 

2007년 8월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의 한 아마추어 고고학자는 두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하나는 청년이 되지 못한 나이의 남성 유해였으며 다른 하나는 여성의 유해였다. 그는 이 유해가 찾지 못했던 나머지 황실가족들이라는것을 직감했다. 지역의 고고학자들과 함께 이 유해를 발굴했는데, 그들의 생각은 맞는듯해보였다. 함께 발견된 총알 역시 황실가족들이 죽었을때 발견된 총알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역시 발견된 몇몇 유품들의 파편들 역시 황실 가족들의 유해와 함께 있던것과 일치했다.

 

이 소식이 발표되었때, 대부분 이들이 황태자와 남은 한명의 여대공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측에서는 이전의 검사 결과에 대한 음모론에 시달렸기에 아예 2007년말 두군데 미국의 연구실에 각각 샘플을 보내서 DNA검사를 하게 했다. 러시아의 연구소에서 검사 하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러시아 국민들이 정부의 발표를 자주 불신했으며 특히 황실가족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예가 정교회가 첫번째 DNA검사를 불신한것이다. 정교회는 이 문제에 민감했는데, 왜냐면 정교회는 황실가족들 모두를 시성했기때문이다. 황족들의 시신은 단순히 황실가족들의 시신이 아니라 정교회의 성자들의 시신이었다.

 

두곳의 연구소 모두 샘플이 황실가족이라고 증명했다. 그리고 정교회는 이전과 달리 DNA검사 결과를 받아들여서 첫번째 발견과 두번째 발견된 유해들이 모두 러시아 황실가족들이라고 인정했다.(여전히 일부에서 역시 우려의 목소리가 있긴하다.) 물론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이번에 발견된 여대공이 아나스타샤인지 마리야인지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유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리고 러시아측 주장을 받아들여 마리야 여대공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예전에 읽은 글에서 누군가 아나스타샤건 마리야건 무슨 상관이냐고 하더라구요. 결국 1918년에 다 죽은거 아니냐고 하더군요.)

 

한세기가량의 논란이 지속되었던 러시아 황실 가족들의 문제는 이렇게 해결되었다. 니콜라이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 알렉세이 황태자와 올가, 타티아나,마리야,아나스타샤 여대공 누구도 1918년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상트 페테스부르크에서 영면에 들었다.

 

 

The Church on Blood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들이 살해당한 집위에 세워진 러시아 정교회 성당입니다.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