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2) 딸의 죽음과 키릴과의 재혼

엘아라 2011. 5. 27. 06:3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마르소 전기 읽다가 미칠것 같습니다..

전쟁이야기는 싫어요...--;;;

클레베르이야기까지만 읽겠다고 읽었는데 읽고나니 정리하기 싫다는...--;;

그래서 이번에는 마르소 이야기도 제낍니다...ㅠ.ㅠ (베르나도트 이야기나 읽을까..ㅠ.ㅠ)

 

대신 예전에 썼었던 더키 이야기 후속편이나 씁니다.

여기 자료출처였던 사이트가 폐쇄됐습니다..ㅠ.ㅠ 거기 읽고 열심히 번역해서 썼었는데 말입니다.

첫번째 이야기는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에든버러의 빅토리아 멜리타) 입니다.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는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아들인 앨프러드와 그의 부인인 러시아의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의 둘째딸입니다. 이때문에 그녀는 영국 여왕이자 인도 여제의 손녀이자 러시아 황제의 외손녀였습니다. 아버지인 앨프러드는 몰타에 열광했기에 딸네미한테 멜리타라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그녀의 애칭은 더키였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첫번째 이야기에서 참조해주세요.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2) 딸의 죽음과 키릴과의 재혼

 

더키는 이혼한후 집은 코부르크로 돌아갔다. 더키는 이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수 있다는 실날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키릴 대공의 처지는 더키와 이루어질수 없는 사이였다. 둘은 사촌간이었으며 정교회에서는 사촌간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교회의 수장인 짜르의 허락이 있을 경우는 가능했지만, 짜르는 둘의 결혼을 허락할리가 없었다. 니콜라이2세는 더키와 에르니의 이혼을 가문의 수치로 여기는 수많은 친척들중 하나였을뿐 아니라, 니콜라이 2세가 무척이나 사랑했던 황후 알렉산드라는 더키를 용서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더키가 자신의 오빠를 버린것을 용납할수 없었고, 딸을 떠난것을 이해하려하지 않았다. 이때문에 키릴은 아시아로 가야만했다. 이에 대해 그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다"라고 회상했다.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은 다른 가족들처럼 아들의 사랑을 반대했다. 하지만 키릴이 더키에게 진심인것을 안후, 그는 아들을 지지해줬고, 더키와 그가 만날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더키와 에르니의 결혼식때쯤 헤센 대공가 사람들

더키와 에르니의 결혼식 다음날 에르니의 동생인 알릭스와 러시아의 황태자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의 약혼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마 약혼 발표 후인듯..

서있는 사람들 왼쪽에서 니콜라이2세, 알릭스,빅토리아,에르니

앉아있는 사람들 왼쪽에서 이레네, 엘라,더키,세르게이 대공

(꼬인 족보관계 살펴보면, 더키 옆에 있는 세르게이 대공은 엘라의 남편이지만 더키의 외삼촌입니다.

더키는 니콜라이2세와도 사촌관계구요 엘라와 세르게이는 오촌관계, 니콜라이2세와 알릭스는 육촌관계입니다.)

 

 

더키는 딸 엘리자베트와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엘리자베트는 어머니가 자신을 떠났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았고 이때문에 더키는 딸과 매우 서먹한 사이였다. 그리고 이런 서먹한 사이는 곧 끝난다.

더키의 딸인 엘리자베트는 1903년 11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아버지 에르니와 짜르 가족들과 함께 휴가를 보내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고열이 나면서 손 쓸사이도 없이 사망했다. 더키는 딸이 위독하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기차역으로 갔지만, 기차역에서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딸의 장례식이 치뤄지는 다름슈타트로 갔다.

에르니는 딸의 죽음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사랑하는 딸이었기에 엘리자베트의 장례식은 마치 동화속의 한 장면처럼 연출됐다. 그는 백마가 끄는 마차에 딸의 관을 실었으며, 거기에는 하얀 천으로 장식되었고 꽃으로 뒤덮혔었다. 하지만 이런 아름다운 모습은 에르니에게 큰 위안은 되지 않은듯했다. 그는 20년이 지난후에도 죽은 딸에 대해 자신의 "햇살"이라고 언급했다.

더키에게는 엘리자베트의 죽음은 아마도 다름슈타트에서의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던듯하다. 그녀에게 헤센의 대공비로써 살았던 과거와의 연결 고리는 딸 엘리자베트였을 것이다. 이런 딸이 죽음으로써 그녀는 과거와의 연결고리가 끊어졌던것이다.

 

 

엘라와 더키

 

하지만 더키는 여전히 외로웠다. 사랑하는 사람은 멀리 아시아에 있었으며, 어머니와 자매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왕족 친척들이 그녀에게 적대적이기 때문이었다.

 

이루어 질수 없는 키릴과의 관계는 비극적 사건을 통해서 다시 연결된다. 아시아에 있었던 키릴은 러일 전쟁에 참전중이었다. 뤼순항에 있었지만, 일본의 심한 공격으로 항구는 봉쇄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느 폭풍우 치는날 이 봉쇄를 뚫기 위한 작전에 키릴은 참전했다. 하지만 그 작전은 대 실패였다.

키릴은 사령관이었던 마카로프의 참모로 그의 기함에 타고 있었다. 제독의 기함은 기뢰에 정통으로 맞았고 배는 폭발했다. 사령관과 함께 있던 키릴은 배에서 튕겨져 나왔다. 키릴은 브릿지에 있었던 사람중에 유일한 생존자였다. 제독과 그의 참모들 대부분이 그 폭발로 사망했다. 키릴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빠져나올수 있었다. 배가 가라 앉으면서 생긴 회오리에 휘말렸고 그는 거의 삶을 포기하려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 드린후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여인"에 대해 떠올렸을때 회오리가 멈췄고 그는 간신히 살아나올수 있었다. 그리고 얼음같은 물속에서 러시아 구축함이 구조하러 오길 기다렸다. 그의 생존은 기적에 가까웠다. 황실 가족들은 그의 생존에 기뻐했으며, 더키 역시 사랑하는이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키릴이 살아 돌아온후 그에게 특별히 외국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졌다. 이때문에 더키는 키릴을 다시 만날수 있었다.

 

 

더키가 사랑했던 사촌

러시아의 키릴 블라디미르 대공

 

이 사건 이후 키릴은 더키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전까지 그는 제위에 대한 고민으로 더키와의 결혼을 망설이고 있었다. 짜르의 허락없이 결혼한다면 그는 계승권을 박탈당할수 있었는데, 당시 그의 계승 순위는 니콜라이2세의 동생과 아버지 블라디미르 대공의 뒤를 이어 세번째였기에 사실상 제2 제위계승자였다. 이 때문에 그의 어머니인 미헨 대공비는 아들에게 더키를 사랑한다면 그녀를 정부로 삼고 결혼만은 다른 여성과 하라고 할정도였다.

그리고 1904년 키릴의 결심을 굳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니콜라이 2세에게 아들이 태어난것이었다. 이제 키릴은 계승순위가 훨씬 멀어졌으며, 이때문에 키릴은 이제 짜르가 그의 결혼에 대해 덜 신경쓰게 될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1905년은 러시아에 최악의 해였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했으며 제국의 곳곳에서 무능력한 제국에 대항하는 폭동과 파업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런 소란은 황실 일가에 대한 테러로 다시 번졌고, 키릴의 숙부이자 더키의 외삼촌이었던 모스크바의 인기없는 통치자 세르게이가 폭탄테러로 살해당했다. 키릴은 이런 러시아가 살기 불안정하다고 여겼다. 황실 가족들은 늘 테러의 대상이었기에 키릴 역시 안심할수 없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도시로 가서 오래 머무르기로 했다. 그가 떠나기전 고해 신부에게 사촌과의 결혼이 허용될것인가를 물었다고 한다. 정교회는 사촌간의 결혼을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해 신부는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1905년 8월 키릴과 더키는 코부르크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예배당에서 더키의 어머니와 여동생 그리고 궁정 조신 한명과 그의 고용인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키릴과 더키가 가장 좋아하는 숙부이자 외삼촌이었던 알렉세이 대공은 여기 초대 받았지만, 왜 초대했는지 몰라서 결혼식이 끝난후에야 도착했다. 

 

 당사자들은 둘의 결혼이 적당히 용서 받을수 있을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짜르는 이들을 쉽게 용서하지 않았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