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흑...글 읽기가 싫어요..ㅠ.ㅠ 책속의 인물들이 점점 전쟁이랑 관련된 인물이 많네요ㅠ.ㅠ
게다가 하고 싶었던 로센 백작은 자료가 없구요..(어디 가계도라도 있음 찾아보겠는데 다니는 스웨덴어 사이트에도 안나오고 말입니다..ㅠ.ㅠ 스웨덴어는 진짜 찍기 수준이라서 검색해서 자료찾으려면 엄청 오래걸리거든요...ㅠ.ㅠ)
그래서 또 아는 글을 올립니다.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3) 러시아
니콜라이 2세는 키릴과 더키의 결혼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더키와 키릴의 결혼을 인정하지 않을거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허락없이 결혼한것에 대해 매우 심한 모욕감을 느꼈다. 짜르는 키릴이 제국의 다른 많은 이들처럼 자신에게 반항한다고 느꼈으며, 특히 가까운 제위계승자인 그가 그런식으로 행동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니콜라이 2세
결혼소식이 알려지자 니콜라이 2세는 키릴의 모든지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한후 추방하겠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은 키릴의 군대 직책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대공으로써 가졌던 모든 권한과 재산을 박탈하겠다는 의미였다. 짜르의 가혹한 처사에 키릴의 가족들은 분노했다. 특히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은 너무 화가나서 짜르를 찾아가서 큰소리로 화를 냈고, 자신의 직책도 반납하겠다고 했다. 블라디미르 가문은 러시아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을 중심으로 하는 사교계 서클은 러시아를 이끌어가는 중심중 하나였기에 블라디미르 대공과 미헨 대공비의 위치가 중요했다. 니콜라이2세와 그 황후는 알려진대로 러시아 상류사회에서 매우 고립되어있었고, 이런 마찰들은 짜르 일가가 러시아 사람들에게 더욱더 나쁜 평판을 얻게 되는 원인중 하나가 였을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고 숙부의 행동을 무시했지만, 내심 크게 당황했다. 결국 짜르는 숙부의 사퇴를 받아들이는 대신 키릴의 군대 직위만 박탈하고 대공 지위는 유지한채 추방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키릴의 아버지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큰형인 니콜라이 대공이 죽은후 둘째 형이자 "단순무식"한 인무로 알려져있던 알렉산드르 대공이 황태자가 됐을때 많은 이들이 알렉산드르 대공보다 더 똑똑한 블라디미르 대공이 황태자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이후 블라디미르 대공에게는 자주 "제위를 탐낸다"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닙니다.
결혼후 키릴과 더키는 부모의 도움으로 프랑스에서 살았다. 곧 첫째아인 마리야가 태어났다. 둘은 다른 망명왕족들처럼 무료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들의 처지는 곤궁했는데 키릴은 수입이 없었고, 더키도 재산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수많은 왕실 친척들은 키릴과 더키에 대해서 좋지 않게 보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루한 망명생활은 곧 끝난다.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이 죽어가고 있을때 니콜라이2세는 키릴의 망명을 재고하게 된다. 그에게 후계자인 알렉세이가 태어나긴했지만, 알렉세이의 탄생이 러시아 제위 문제를 해결한것은 아니었다. 알렉세이는 혈우병 환자였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다. 황후의 오빠인 프리드리히는 겨우 3살때 사고로 사망했다. 황후의 외삼촌인 레오폴드는 성인이 되어 결혼할때까지 살았지만, 사소한 사고로 결혼한지 3년도 안되서 사망했다. 그때문에 알렉세이 만으로는 황위가 불안정했다. 게다가 제 2 황위계승자였던 니콜라이 2세의 동생인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은 평민 출신의 이혼녀와 동거중이었으며 그녀와 결혼하길 원했다. 이것은 치명적인것이었는데 귀천상혼은 제위계승권을 박탈당할 이유였다. 아마도 니콜라이 2세는 동생의 행동때문에 키릴에 대한 처분을 달리 생각하게 됐을것이다. 키릴은 비록 이혼녀였고 사촌이긴 했지만, 러시아 황제의 외손녀이자 영국 여왕의 손녀와 결혼했다. 미하일보다는 훨씬 더 제위계승조건에 맞는 결혼이었다.
키릴의 아버지인 블라디미르 대공이 1909년 사망했다. 키릴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허락되어 러시아로 돌아갈수 있었다. 이때 니콜라이 2세는 사촌을 만났고, 그의 결혼을 승인했다고 알려준다. 니콜라이 2세는 그동안의 추방에 대한 화해의 표시로 더키에게 러시아 정교회 전통이름이 아닌 "빅토리아"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것을 허락했다. 이제 더키는 러시아의 제3황위계승자의 아내인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가 된것이었다.
러시아 대공비의 정식 예복을 입고 두딸과 함께 있는 더키
둘째딸인 키라는 후에 호엔촐레른가의 수장과 결혼합니다.
키릴과 더키가 러시아로 돌아올때 더키는 두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만약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난다면 키릴의 입지는 더욱더 확고해질것이었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아이는 딸이었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키라라는 이름을 붙였다.
더키는 러시아에서 대공비로 매우 즐거운 생활을 했다. 더키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문학을 읽으며 러시아와 친숙해지려했다. 더키의 시어머니인 미헨 대공비는 당시 러시아 사교계를 이끌어가던 인물중 하나였다. 황후인 알렉산드라는 "수줍음"이 많았기에 좀더 고립된 생활을 했었고, 사람들은 미헨대공비나 황태후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 주변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이런 상황은 러시아 인들이 더키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했다.
이런 더키의 삶은 1차대전으로 바뀌게 된다. 1차대전이 진행되면서 러시아의 혼란은 더 커져갔다. 키릴 주변의 사람들은 고집불통인 황제를 퇴위시켜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은 현실이 된다. 혁명이 일어난것이었다. 혁명이 일어나는 동안 키릴은 수도 상트페테스부르크를 지키고 있었다. 두마는 모든 군인들에게 황제가 아닌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키릴은 두마에 충성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부대가 반란을 일으킬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두마에 충성을 맹세했다. 이 행위는 키릴을 오래도록 괴롭히는 문제가 된다. 그는 짜르를 배신한 첫번째 인물이었으며, 후에 제위를 요구할수 있는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늘 그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왔다.
비록 키릴의 부하들은 키릴을 보호했지만, 황실가족들은 러시아에 남아있는것은 위험했다. 특히 더키는 다시 임신중이었고, 노산이었기 때문에 매우 위험할수도 있었다. 결국 키릴은 러시아 제국의 영토이지만, 혁명과는 많이 떨어진 핀란드로 가기로 한다. 그리고 자신이 후원했던 몇몇 이들의 도움을 받아 아내와 딸들을 데리고 몰래 핀란드로 피신했다.
전쟁전의 더키와 키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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