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루이 15세와 가족들...(4)아들 도팽 루이와 부인들

엘아라 2011. 1.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이제 아들인 도팽 루이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재미난 사실은 프랑스 왕실에서 왕위계승자들이 엄청귀했다는 거라죠. 도팽 루이는 루이 16세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

 

 

 

루이 15세와 가족들...아들 도팽 루이와 그 가족들

 

 

 

도팽 루이

루이 15세의 후계자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

Louis of France

(4 September 1729 – 20 December 1765)

 

루이 1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도팽 루이는  루이 15세의 네번째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위로는 세명의 누나가 있었죠. 이후 남동생이 태어났지만 일찍 사망했기에 그는 루이 15세의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으며, 그의 어머니인 마리 레슈친스카는 이 아들을 끔찍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아들 루이와 함께 있는 마리 레슈친스카

 

그는 매우 성실한 성품으로 성장했는데, 학구적이었으며 잘 교육받았으며, 문화적 소양이 뛰어났고 음악을 깊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사냥이나 무도회 같은 활동보다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더 즐겼습니다.

루이는 난봉꾼이었던 아버지 루이 15세와 달리 아내에게 매우 성실했으며, 이런 그의 모습에 그의 누나와 여동생들 그리고 어머니는 이상적인 카톨릭 왕족의 삶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1747년 루이

 

어린시절부터 군대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아버지인 루이 15세는 아들이 전장에 나가는것을 금했기때문에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에 참전하고 싶어했던 루이의 희망을 꺽었습니다. 사실 후계자인 외아들이 전쟁터에 나간다는것은 국왕 입장에서는 허락할수 없는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루이 15세와 도팽 루이의 관계는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고 사이가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루이 15세는 아들이 정치에 관여하는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루이는 정치에서 한발 떨어져 지내야했습니다.

 

1764년의 도팽

 

도팽인 루이는 두번 결혼했습니다. 그는 첫번째 결혼에서 만난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에 두번째 결혼 생활에 약간 어려움이 따랐다고 합니다만, 두번째 부인은 그에 대해 매우 잘 처신했습니다.

 

 

인판타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Maria Teresa Rafaela of Spain

(María Teresa Antonia Rafaela; 11 June 1726 – 22 July 1746)

 

도팽의 첫번째 부인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로 스페인의 펠리페 5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파르마의 이사벨라의 딸이었습니다. 재미난것은 마리아 테레사의 언니가 바로 루이 15세의 약혼녀였던 마리아나 빅토리아였죠.^^* 이 결혼 역시 전통적인 이중 결혼의 하나로 도팽의 누나인 마담 엘리자베트가 마리아 테레사의 오빠인 인판테 펠리페와 결혼한 후 도팽은 스페인 궁정에 소개 되었으며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스페인 궁정에서는 둘이 정식으로 결혼할 나이에 이르기 전까지 마리아 테레사를 프랑스로 보내지 않습니다.

 

 

1731년

 

1745년 2월 프랑스에 도착한 19살의 마리아 테레사는 16살의 도팽 루이와 결혼합니다. 결혼후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식으로 마리 테레즈 라파엘르 드 부르봉 이라고 불렸으며 궁정에서는 마담 라 도피느라고 불렸습니다.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와 루이의 결혼식 가면 무도회 모습

둘의 결혼식 축하연때 루이 15세는 한 여성을 소개 받습니다.

가장 무도회에서 다이애나 여신의 분장을 하고 나타난 이 여성은 바로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는 마담 드 퐁파두르입니다. ^^*

 

루이와 마리 테레즈 라파엘르는 서로 사랑에 빠졌으며 무척이나 행복한 부부가 됩니다. 그녀는 매우 우아했고 아름다웠으며 교육도 잘 받은 사람이었습니다만, 붉은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에  격렬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서양에서 빨간머리가 뭐랄까 성격이 격하다는 편견이 있다고 해요) 국왕과 왕비와도 잘 지냈지만, 소심한 성격이었으며 남편과 마찬가지로 시아버지의 정부들을 싫어했기에 당시 궁정의 중심이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를 싫어해서 궁정에 잘 어울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1745년

결혼 다음해인 1746년에 마리 테레즈 라파엘르는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를 낳은 3일후 사망합니다.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던 도팽은 큰 충격에 빠졌으며 루이 15세는 아들을 죽은 부인 곁에서 강제로 떼어내야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도피느의 장례식

 

 

 

마리 테레즈 라파엘르가 죽은뒤 루이 15세는 다시 아들의 신부감을 찾습니다. 비록 아들의 슬픔을 모르는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왕위계승자였으며 후계자를 얻어야하는 의무가 있었죠. 스페인에서는 마리 테레즈의 여동생을 다른 신부감으로 추천했습니다. 하지만 도팽의 신부는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가 됩니다. 프랑스의 육군 원수가 되는 모리스 드 삭스는 자신의 조카가 되는 마리아 요제파를 신부감으로 추천합니다. 모리스 드 삭스는 폴란드의 국왕이었던 아우구스트2세의 정부였던 쾨스니마르크의 백작영애 마리아 아우로라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때문에 아우구스트2세의 아들인 아우구스트3세의 딸인 마리아 요제파는 그의 조카가 되었죠. ( 모리스 드 삭스의 외삼촌은 조지1세의 부인이었던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와 야밤도주를 하려했던 사람입니다.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Maria Josepha of Saxony

 (Maria Josepha Karolina Eleonore Franziska Xaveria)

( 4 November 1731 – 13 March 1767)

 

모리스 드 삭스의 제안에 국왕과 마담 드 퐁파두르는 호의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하지만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는 이에 반대하죠. 왜냐면, 마리 레슈친스카의 아버지는 마리아 요제파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해서 폴란드 국왕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입니다. 왕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다섯살의 마리아 요제파는 1747년 2월 도팽 루이와 결혼합니다. 프랑스에 온 마리아 요제파는 마리 조세프 드 삭스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궁정에서의 호칭은 마담 라 도피느였죠.

 

 

1751년

이 그림 역시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일겁니다.

(맞는거 같은데 옷 좀 틀린거 같기도 하고..ㅎㅎㅎ)

 

마리아 요제파는 쉽지 않은 결혼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그녀에게 좋은 감정이 아니었으며 남편인 도팽은 첫 아내를 잊지 못하고 있었죠. 하지만 마리아 요제파는 시어머니에게 무척이나 잘 했으며 남편을 이해하려 했습니다.

마리아 요제파가 결혼전 프랑스 궁정에 소개되었을때, 왕비는 마리아 요제파의 팔찌에 있는 초상화를 볼수 있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여성들은 아버지의 초상화가 있는 팔찌를 하는것이 전통이었는데 마리아 요제파가 왕비에게 보여준 초상화는 마리아 요제파의 아버지가 아닌 왕비의 아버지 초상화였습니다. 그리고 마리아 요제파는 왕비에게 이제 결혼을 통해서 로렌의 공작이 시할아버지가 되었기에 초상화를 하고 왔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왕비와 궁정에 매우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고 합니다. 마리아 요제파는 시어머니를 존경했으며 왕비 역시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1765년 경

시어머니와 함께 있는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과의 관계도 잘 이끌어갔는데, 죽은 아내를 못 잊는 남편을 이해하고 남편곁에 조금씩 다가갑니다. 도팽의 첫째딸이자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의 딸이 두살때 사망하자 도팽은 큰 슬픔에 빠졌는데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을 위해 이 의붓딸의 초상화를 주문할 정도였습니다. 정략결혼이었지만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1747년

 

남편이 시아버지의 정부들을 싫어했던것과 달리 마리아 요제파는 마담 드 퐁파두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데 마담 드 퐁파두르가 그녀의 결혼에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정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요제파와 루이 사이에는 모두 여덟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둘은 첫째 아들이었던 부르고뉴 공작을 편애했다고 합니다. 부르고뉴공작은 누구나가 기대하게 만드는 총명한 아이였으며, 도팽과 도피느는 이 큰아들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부르고뉴 공작은 어린 나이로 사망했고, 부모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때문에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 신경을 덜 쓰게 됩니다.

 

 

아들 부르고뉴 공작과 함께 있는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요제파는 시아버지와도 매우 잘 지냈기에, 멀어졌던 루이 15세와 도팽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합니다.

 

1765년 12월 도팽 루이는 결핵으로 서른다섯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마리아 요제파는 남편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슬픔에서 벗어날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은뒤 매우 슬퍼하고 우울해 했으며 점점 말라갔습니다.

 

도팽 루이

1765년경

이 그림 역시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입니다.

 

시아버지인 루이 15세가 손자이자 도팽이 된 루이 (후에 루이 16세)를  오스트리아 여대공인 마리아 안토니아와 결혼시키겠다는 이야기를 했을때 마리아 요제파는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마리아 안토니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성으로 합스부르크가를 상속받았는데,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사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의 백부의 딸이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는 형에게 아들이 없어서 황위를 이어받았는데 그 역시 아들이 없자 딸을 후계자로 내세운것이었죠. 이것은 마리아 요제파의 어머니에게는 매우 부당한것이었으며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 가족들과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었습니다.

 

 

1764년경

 

마리아 요제파는 아들이 결혼하기 3년전 사망합니다.

 

도팽 루이와 마리아 요제파는 모두 여덟아이를 낳았으며 그중 세아들들은 프랑스의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가 됩니다. 딸인 마리 클로틸드는 사르데냐의 왕비가 되었으며 막내딸인 마담 엘리자베트는 미혼으로 살다가 혁명중 처형당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미디어

그림출처

위미 피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