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프랑스

루이 15세와 가족들...(6) 딸 앙리에트,루이즈, 아델라이드

엘아라 2011. 1. 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루이 15세의 딸들을 어떻게 써야할지 솔직히 감이 안 잡히네요..

제가 프랑스를 잘 몰라서 읽으면서 쓰는데 그냥 쓸려니 많고 줄이려니 그림이 많아서 고민입니다.

그냥 그림많은 딸들은 다 쓰고 아닌 딸들은 덜 쓸까..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루이 15세와 가족들 ... 딸 앙리에트와 루이즈, 아델라이드

 

 

 

 

마담 앙리에트

Anne Henriette de France

(14 August 1727 - 10 February 1752),

 

루이 15세의 딸중 마담 앙리에트는 언니인 엘리자베트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언니와 동생들과 함께 베르사유에서 성장했습니다. 앙리에트는 아버지인 루이 15세가 제일 사랑한 딸이었죠.

 

 

1742년

마담 앙리에트

 

12살때 언니인 엘리자베트가 스페인으로 시집가버리자 크게 상심했으며, 슬픈 마음을 음악에 열중하는것으로 달랬다고 합니다. 앙리에트는 자신의 친척이 되는 오를레앙 공작의 후계자였던 샤르트르 공작 루이 필리프 도를레앙과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결혼하길 바랬습니다. 앙리에트의  아버지인 루이 15세는 둘이 연결되는것을 처음에는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도팽에게서 후계자를 얻지 못한다면 왕위가 오를레앙 가문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는데, 딸을 오를레앙 가문으로 시집보낼경우 이를 거의 확정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었죠. 루이 15세와 스페인- 부르봉 가문은 오를레앙가문에 프랑스 왕위가 가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둘은 강제로 헤어져야했으며 앙리에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습니다.

 

 

마담 앙리에트

 

베르사유에서 살면서 그녀는 남동생인 도팽과 여동생들과 매우 친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또 어머니와도 매우 다정한 관계였습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정부들을 싫어했는데, 특히나 퐁파두르 후작부인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정부들을 미워한 이유는 어머니가 버림받은것이 정부들때문이라고 여겨서였습니다. 언니인 엘리자베트가 마담 드 퐁파두르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자 매우 화를 냈다고도 합니다.

 

1752년 24살때 천연두로 앙리에트는 사망합니다. 그녀의 무덤은 프랑스 혁명중 파괴되었습니다.

 

 

 

 

 

마담 루이즈

 Marie Louise de France, fille de France

(28 July 1728 – 19 February 1733)

 

마담 루이즈는 루이 15세의 셋째딸로 태어났습니다. 후계자를 바라던 루이 15세는 셋째딸이 태어났을때 실망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궁정에서는 아이가 자라난 이후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받는 세례식을 하는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때문에 루이즈 역시 어린시절에는 이름을 받지 못했으며 셋째였던 그녀는  Madame Troisième 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마리 루이즈라는 이름은 죽기 몇주전에 세례식으로 받은 이름이었습니다.

루이즈는 언니와 남동생과 함께 베르사유에서 자랐습니다.

1733년 겨울 어린 공주는 당시 베르사유에 유행하던 감기에 걸렸는데, 갑자기 상태가 악화됩니다. 그녀는 서둘러 세례를 받았고, 몇주후 사망합니다.

 

 

 

 

마담 아델라이드

Marie Adélaïde de France

 (23 March 1732 -  27 February 1800)

이 그림 역시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입니다.

 

마담 아델라이드는 루이 14세의 넷째딸로 언니 오빠와 함께 베르사유에서 성장했습니다. 마담 아델라이드의 여동생들은 모두 수녀원에서 교육받았습니다.

마담 아델라이드가 결혼할 나이에 이르렀을때, 프랑스 국왕의 딸과 결혼할만한 신분의 미혼 남성들을 찾기 힘들었고 결국 마담 아델라이드는 여동생들과 함께 미혼으로 남았습니다. 그녀는 역시 음악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달과 사냥의 여신인  다이애나로 분장한 마담 아델라이드

역시나 베르사유 특별전에 온 그림입니다.

1745년

 

마담 아델라이드는 뛰어난 기수였기에 아버지와 자주 승마를 같이 하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잠시 얻습니다. 하지만 루이 15세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습니다. 마담 아델라이드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했습니다만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아버지, 오빠, 조카에게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습니다.

 

 

1749년

 

 1751년

 

 

1763년

 

마담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형제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정부들을 싫어했으며,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온 후에는 마담 뒤바리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관계를 악화시키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간섭으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담 뒤바리와의 싸움에서 지게 되자, 마담 아델라이드는 이에 앙심을 품었으며, 이후 베르사유에 많은 악의적 소문을 퍼트리기도 합니다.

 

 

마담 아델라이드

1787년

 

혁명이 일어난 직후 마담 아델라이드와 그 동생인 마담 빅투아르는 탈출하는 왕실 가족들과 함께 가다가 도로 베르사유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둘은 카롤릭을 반대하는 혁명법때문에 프랑스를 떠나 조카이자 루이 16세의 동생이 왕비로 있던 사르데냐로 갑니다. 그후 여러곳을 거쳐  코르푸섬으로 갔고 그곳에서 동생 마담 빅투아르가 사망합니다. 동생이 죽은후 마담 아델라이드는 다시 코르푸를 떠났으며 동생이 죽은1년후 로마에서 사망합니다.

 

 

마담 아델라이드

1787년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