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루이 15세의 결혼은 여러가지 정치적 사건들과 연결됩니다. 그는 스페인 출신의 왕녀와 약혼했지만, 파혼하고 폴란드 국왕의 딸과 결혼합니다.하지만 마리야 레슈친스카는 프랑스 왕비가 되기에는 신분이 좀 낮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럼 루이 15세의 약혼녀였던 스페인 왕녀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까합니다.^^*
루이 15세와 가족들...약혼녀였던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마리 안 빅투아르)는 스페인의 펠리페5세와 그의 두번째 부인인 파르마의 상속녀 이사벨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루이 15세와 사촌관계였는데, 펠리페5세는 루이 14세의 손자로 루이 15세의 숙부였습니다.
1723년의 스페인 왕실 가족들
펠리페5세와 그 가족들
저기 초상화로 그려진 여성이 마리아나입니다.
마리아나는 1721년부터 1725년까지 프랑스에 있었습니다.
마리아나와 루이 15세의 약혼은 섭정이었던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주도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스페인과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펠리페 5세의 딸을 루이 15세와 결혼시키기로하고, 자신의 딸들인 엘리자베트와 필리피느를 각각 펠리페 5세의 아들들과 결혼시키기로 합니다.
1721년경의 마리아나
마리아나는 3살에 프랑스 궁정으로 와서 루이 15세의 왕비가 될 여성으로 교육받습니다. 그녀의 교육은 콩티공비이자 루이 14세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딸인 마리 안이 맡았습니다. 마리아나는 너무 어렸기때문에 그녀가 성인이 될 때 결혼하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마리아나가 프랑스에 왔을때 11살이었던 루이 15세는 겨우 세살밖에 안된 미래의 신부감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린 약혼녀와 함께 있는 루이 15세
섭정의 어머니였던 오를레앙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는 마리아나에 대해 "매우 사랑스럽고 예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1724년
하지만 마리아나와 루이 15세의 결혼은 성사되지 못합니다.
마리아나를 프랑스 왕비감으로 지지했던 섭정 오를레앙 공작은 1723년 섭정지위를 잃었습니다. 왜냐면 1723년 2월 루이 15세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기때문이죠.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권력자가 된 사람은 부르봉 공작이자 콩데 공인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이었습니다. 루이 앙리의 어머니는 루이즈 프랑수아즈 드 부르봉으로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이었죠. 그는 마리아나가 아닌 다른 여성을 프랑스 왕비로 내세우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나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루이 15세의 후계자를 바로 얻을수 없었으며 또 스페인의 공주인 마리아나보다 자신에게 좀더 이익이 되는 여성이 왕비가 되길 바랬습니다. 그는 여동생을 왕비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루이 15세에 대한 영향력을 더 오래 지속할수 있을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1725년
스페인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1725년 결국 마리아나와 루이 15세간의 약혼은 파혼으로 끝나게 됩니다. 둘이 파혼하게 된 것에는 오를레앙 공작이 이미 사망한것과, 오를레앙 공작의 딸인 엘리자베트의 남편이 스페인 국왕이 되었지만 일찍 사망한것이 한몫했습니다. 세살에 프랑스 궁정으로 왔던 마리아나는 일곱살에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녀에 대해 루이 15세는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작별인사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때 스페인으로 갔던 오를레앙 공작의 두 딸 역시 다시 프랑스로 돌아옵니다.
1725년
스페인으로 돌아온 마리아나는 다시 정략결혼의 상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포르투갈이었죠. 그녀는 주앙5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주제1세와 결혼하고, 주제1세의 누나인 바르바라는 마리아나의 이복오빠와 결혼하게 됩니다.
1729년 11살이었던 마리아나는 15살이었던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자 주제와 결혼합니다. 둘은 결혼후 음악에 대한 공통점과 깊은 신앙심으로 매우 가까운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마리아나의 남편인 주제는 너무나 경건한 부인에게서 벗어나 수많은 정부를 둡니다. 마리아나는 남편이 정부들을 들이는것을 매우 못마땅해했습니다.
올케이자 시누이가 되는 포르투갈의 바르바라와 함께
왼쪽이 마리아나 오른쪽이 바르바라입니다
마리아나는 남편이 포르투갈의 왕이 되자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기는 매우 어려웠는데 특히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십만명이상이 사망했을때는 더욱더 그랬습니다. 지진으로 큰 충격을 받은 주제1세는 이후 고행을 했으며, 벽이 있는 건물에서 편안하게 사는 삶을 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편이 병으로 쓰러진후 마리아나는 포르투갈의 섭정이 되었으며, 딸인 마리아가 즉위한 후에도 잠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남아메리카에서 서로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자 두 나라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포르투갈의 주제1세와 그의 왕비인 스페인의 마리아나 빅토리아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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