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루이14세의 적자는 아들이자 후계자였던 르 그랑 도팽이라고 불렸던 아들 루이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른 다섯아이들은 모두 어려서 사망했습니다.
보통 프랑스의 왕위계승자는 도팽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프린스 오브 웨일즈나 아스투리아 공 같은 칭호와 같은 이유입니다만, 설명하려니 어느때였는지 기억이 안나네요...ㅎㅎㅎ
(하여튼 어느 프랑스 왕때였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하여튼 왕실에서 Dophine지방을 얻은 이후 왕위계승자를 저렇게 불렀나 그럴껍니다.)
어쨌든 르 그랑 도팽이라고 불린것은 르 쁘띠 도팽이 있어서 그런거겠죠.^^*
루이14세와 가족들... 아들 르 그랑 도팽과 그 자녀들
루이14세의 장남이자 후계자 루이
"르 그랑 도팽"
루이14세와 마리 테레즈의 큰아들이었던 루이는 후계자로 도팽(Dauphi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죠. 루이14세의 적자들중 유일하게 성인이 될때까지 살아남았던 아들이었지만, 루이14세보다 일찍사망했습니다.
루이14세의 화려한 궁정에서 살았지만, 그는 게으르고 약간 모자란 인물로 자주 묘사되고 있다고 합니다. 성인이 될때쯤 그는 하루종일 그냥 의자에 앉아서 노닥거리는일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이것은 후계자였지만, 절대권력을 가졌던 아버지 밑에서 그다지 정치적인 입지를 크게 못내세웠기에 그냥 노닥거렸을듯하네요.
어린시절의 루이
르 그랑 도팽 루이는 후계자였지만 정치적으로 그다지 입지가 크지 못했습니다. 그는 베르사유 궁정에서 떨어진곳에서 생활했으며, 아버지와 아버지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귀천상혼한 부인 마담 드 맹트농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죠. 하지만 마담 드 맹트농은 궁정에서 왕비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했던 두 이복 여동생들인 콩데 공비(루이즈 프랑수아즈, 루이14세와 몽테스팡 후작부인의 딸)와 콩티 공비(안 마리, 루이14세와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의 딸)와 함께 잘 어울렸으며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었습니다. 재미난것은 아들이자 르 쁘디 도팽이라고 불렸던 후계자 부르고뉴 공작과 며느리인 공작부인인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와는 반대되는 입장이었다는것이죠.
루이
루이는 스페인 왕위계승문제가 발생하자, 자신의 왕위계승 권리를 포기합니다. 그의 어머니 마리 테레즈의 지참금이 다 지급되지 않았기에 프랑스는 왕위계승권을 주장했고, 유일한 자녀였던 루이와 그 후손들이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죠. 루이는 둘째아들인 앙주 공작 필리프를 위해 자신의 왕위계승권을 포기합니다. 이후 필리프는 스페인의 펠리페5세가 되죠. 루이는 윌리엄3세와의 조약을 극구 반대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윌리엄 3세는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위가 분리되어서 계승되고, 몇몇 땅들을 나누는것에 동의 한다면 프랑스와 협정을 체결하려했습니다. (이것이 깨진것은 카를로스2세가 앙주공작을 왕위계승자로 지지한것과 더불어 이에 힘을 얻은 루이14세가 대놓고 윌리엄3세를 영국국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도망간 사촌이었던 제임스2세와 올드 프리텐데를 다시 지지했기때문입니다.)
도팽의 세 아이들
앙주공작,베리공작,부르고뉴 공작
루이는 젊은 시절 사촌인 마리 루이즈 도를레앙과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둘은 비밀리에 결혼을 약속했을거라는 이야기가 돌정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이14세는 둘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고, 마리 루이즈를 스페인의 왕비로 만듭니다. 이때문에 몇몇 사람들은 마리 루이즈가 프랑스 왕비가 되지 못하고 스페인 왕비가 된것은 마리 루이즈가 루이14세의 친딸이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루이14세가 아들과의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딸을 위해 스페인의 왕비자리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루이14세가 이미 약혼한 아들의 약혼을 깨면서 까지 사촌과 결혼시키는것이 이익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듯합니다.^^*
르 그랑 도팽에게는 이미 어린시절부터 약혼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 빅토리아 였죠. 그녀는 결혼후 마담 라 도피느라고 불렸습니다. 결혼후에 프랑스 식으로 도피느 마리 안 빅투아르로 불렸습니다. 아름답지 않았던 그녀는 궁정에서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아름다운것을 숭상하던 베르사유에서 그녀의 존재는 좀 이질적인것이 되었으며, 특히 시어머니인 마리 테레즈가 사망한후 궁정에서 가장 높은 여성이 되었을때는 의무에 대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기에 루이14세는 며느리가 의무를 소홀히 한다고 여겨서 점점 싫어하게 됩니다.
정부와 함께 지냈내던 남편 때문에 마리 안 빅투아르는 외롭게 생활했으며 혼자 지내던 아파트에서는 언제나 독일어를 쓰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독일어를 하지 못했죠. 자신과 비슷한 처지(독일 출신의 아름답지 않았던..--;;)였던 숙모인 "마담"(리젤로트)와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도피느 안 마리 크리스틴 빅투아르
부인이 우울증으로 죽은후 루이는 정부였던 여성과 귀천상혼했습니다. 루이는 매우 짠돌이라서 늘 정부에게 쓰는 돈을 아까워했는데, 그의 정부였던 Marie Émilie de Joly de Choin는 이런 생활을 잘 참았다고 합니다. 아마 어머니가 죽자 귀천상혼했던 아버지 루이14세를 따라한듯합니다만, 궁정에서 왕비처럼 대접받았던 마담 드 맹트농과 달리 그녀는 궁정에서 받아들여지지도,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루이의 두번째 부인
Marie Émilie de Joly de Choin
르 그랑 도팽 루이는 부인인 마리 안 빅투아르와 세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르 그랑 도팽의 가족들
도팽 부부와 아기는 베리 공작, 앉아있는 아이는 펠리페5세, 서있는 아이는 부르고뉴공작
큰아들은 역시 루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뉴 공작이었죠. 그는 직계 왕위계승자였기에 "르 쁘디 도팽"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그는 열다섯살때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와 결혼합니다. 마리 아델라이드는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의 외손녀였죠. 둘은 당시 궁정에서는 드물게 매우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게다가 마리 아델라이드는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해서 궁정의 권력을 쥐고 있던 마담 드 맹트농과 루이14세의 사랑받는 손자 며느리였다고 합니다. 부르고뉴 공작은 아버지가 죽은후 도팽칭호를 물려받고 왕위계승자가 됩니다만, 사랑했던 부인이 홍역으로 앓아눕자 그 곁을 지켰고, 부인이 죽은지 육일 후에 사망합니다.
부르고뉴 공작 부부
"르 쁘디 도팽" 루이와 사보이의 마리 아델라이드
루이15세의 부모
둘사이에는 아이가 둘이 있었는데, 큰아들 역시 부모가 죽은지 한달만에 홍역으로 사망합니다. 둘째아들 역시 아팠는데, 부르고뉴 공작 부부와 그 큰아들을 사망케 만들었던 의사들이 이번에 역시 같은 치료법을 이 둘째아들에게 시행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이 둘째아들의 보모였던 여성이 방문을 걸어잠그고 의사의 접근을 막은채 아이를 간호해서 낫게했습니다. 이 나은 아이가 바로 루이14세의 후계자가 되는 루이15세입니다.
(..무슨 요법이었냐구요..바로 사혈법이었습니다. 예전에 잘못된 사혈법이 유행한다는 뉴스가 나왔는데 그거 보고 나서 순간 "어랏 저거 선전할때 프랑스 왕실 전통비법"이러는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그 사혈법으로 왕족들 여럿 잡았습니다.-0-;;)
두 아이와 함께 있는 부르고뉴 공작부인
저기 아기가 후에 루이15세입니다.
둘째아들은 스페인의 국왕이 되는 펠리페5세입니다. 형의 가족들과 동생이 대부분 죽고 할아버지 루이14세의 후계자로는 딸랑 형의 아들인 앙주 공작 루이(루이15세)만 남게 되자 왕위가 오를레앙가로 갈것을 우려해서 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해서 다시 고려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스페인 국왕이 될수 있었던것은 순전히 프랑스와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분리했기때문이었기에 만약 루이15세에게 무슨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프랑스 왕이 되려면 전쟁을 해야했죠. 잠깐 시도는 해봤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스페인 부르봉가와 프랑스 부르봉가는 그냥 쭉 따로 갑니다.^^* 딸이었던 마리아나는 한때 루이15세의 약혼녀였지만, 후계를 걱정했던 섭정 부르봉공이 약혼을 깼고, 이때문에 한동안 프랑스와 스페인사이가 좀 험악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후에 포르투갈의 왕비가 됩니다.)
1723년의 펠리페5세의 가족들
저기 초상화로 그려진 사람이 루이15세의 약혼녀였던 딸입니다.
셋째아들은 베리 공작이었던 샤를입니다.
샤를은 셋째아들이었기에 왕위계승권과 멀어보였습니다만,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후 많이 달라집니다. 그의 아버지가 죽고 난뒤 형이 도팽이 되고, 작은 형은 스페인의 왕이 되자 그는 중요한 왕족이 됩니다. 왕위계승자가 모자라던 프랑스와 스페인에 중요한 인물이 된것이었죠. 만약 프랑스나 스페인에 직계 왕위계승자가 없다면 둘중 한곳을 그가 이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죠. 이때문에 프랑스 내에서 그의 지위가 중요하게 되었고, 결국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2세와 부인인 프랑수아즈 마리의 딸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과 결혼합니다. 그녀는 오를레앙공작이 제일 사랑한 딸이었고, 프랑수아즈 마리는 루이14세가 사랑한 딸이어서 매우 거만했다고 합니다. 샤를은 형이 죽고 난후 조카인 루이15세의 섭정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역시 사고로 사망합니다.
베리 공작 부부
베리 공작 샤를과 그의 부인인 마리 루이즈 엘리자베트 도를레앙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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