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러시아의 대공비들...2. 니콜라이1세의 며느리들과 손주 며느리들

엘아라 2009. 3. 3. 01:27

니콜라이1세는  파벨1세의 아들로 형인 알렉산드르1세의 후계자가 없자 대신 황제가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1세는 통치자로 교육을 받지 못한 니콜라이보다는 바로 밑의 동생인 콘스탄틴 대공이 황제가 되길 바랬다고 합니다. 하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형인 알렉산드르1세에게 자신은 황제가 될마음이 없다고 밝혔고, 황위를 자신이 아니라 다음 동생인 니콜라이에게 물려주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드르1세가 사망했을때, 니콜라이는 큰형이 둘째형인 콘스탄틴대공이 아니라 자신을 황위계승자로 지명한것에 놀랐고,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고 합니다. 군이 콘스탄틴 대공을 지지했기에, 니콜라이는 자신이 황위계승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보다는 형인 콘스탄틴대공에게 충성맹세를 하는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했습니다. 하지만, 바르샤바에 있던 콘스탄틴대공은 동생인 니콜라이에게 충성맹세를 했고, 결국 모스크바로 가서 자신은 황위를 포기했다는 사실을 공표해야만했다고합니다.

 

니콜라이 1세의 아들들은 모두 황위계승기준에 맞는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 알렉산드르2세의 며느리들은 앞에서 했기에 생략합니다.

 

 

첫번째 소개할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르2세의 황후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입니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Maria Alexandrovna (in Russian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Empress consort of Alexander II of Russia.

Marie of Hesse and by Rhine

(8 August 1824 - 8 June 1880)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는 헤센의 대공인 루드비히2세와 그의 부인인 바덴의 빌헤미네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마리와 그녀의 오빠인 알렉산더는 루드비히2세의 자녀가 아니라 대공비의 시종무관인 남작의 아이들로 스캔들을 원치 않았던 루드비히2세가 자녀로 인정한것이라고 알려져있습니다.

빌헤미네 대공비의 언니들은 알렉산드르1세의 황후였던 옐리자베타 황후, 스웨덴의 프레데리카 왕비, 바이에른의 왕비이자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와 황후,작센의 왕비들,프로이센의 왕비의 외할머니가 되는 아말리에입니다.

알렉산드르2세는 16살의 아름다운 마리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결혼을 하려 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1세는 당연히 마리의 출생에 대한 스캔들을 알고 있었고, 처음에는 반대하죠. 하지만 곧 마리가 자신이 찾던 이상적인 며느리감이라는 것을 알았고 며느리에 대해서 무척이나 호의적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리의 출생에 대한 스캔들이 궁정에서 계속 이야기되는것을 막기 위해 니콜라이1세는 궁정에 자신의 며느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것을 엄금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르2세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마리 대공녀와 결혼해서 모두 아들 여섯과 딸둘을 얻었습니다. 결혼후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라는 이름을 얻은 황후는 매우 순종적이었으며,시아버지인 니콜라이1세가 정치적 조언을 구할정도로 똑똑하고 교육을 잘 받았으며, 절대 정치에 나서지 않고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 교육에 힘썼던 참한 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매우 연약했고, 어린나이에 많은 아이들을 낳았기에 건강이 늘 좋지않았다고합니다. 장남의 사망으로 황후는 종교에 심취했고, 황제와 사이가 멀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제는 딸같은 나이의 예카테리나 돌로루카야 공녀와 사랑에 빠져서 황후가 죽기전에 "이제 신앞에서 나의 부인은 너다"라고 말하고 예카테리나와 살림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테러가 극심해지자 죽어가는 황후의 침실 바로 위에 예카테리나와 아이들의 방을 마련했다고 합니다. --;;;; 게다가 황제는 예카테리나와의 아이들을 데리고 황후에게 가서 축복을 내려달라고 까지 했고 죽어가던 황후는 축복을 내려줬다고 합니다.

 

...... 황제가 사랑에 빠진것은 이해하지만 참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황후가 죽은후 황제는 예카테리나와 귀천상혼했고, 유리예프스카야 공비 칭호를 줍니다

 

빈터할터가 그린 아름다운 마리야 황후의 초상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2세

그는후에 테러로 사망했습니다.

 

두번째는 니콜라이1세의 둘째며느리인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입니다.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

작센-알텐부르크의 알렉산드라

Grand Duchess Alexandra Iosifovna of Russia (Александра Йосифовна)

 Princess Alexandra Friederike Henriette of Saxe-Altenburg

 (8 July 1830 Altenburg – 6 July 1911 Saint Petersburg), 

 

작센-알텐부르크의 공작의 딸로 태어났던 그녀는 니콜라이1세의 둘째아들인 콘스탄틴대공과 결혼합니다. 그녀의 자매들은 올덴부르크 대공비와 하노버의 왕비가 되죠. 젊은시절 그녀는 일찍죽은 남편의 누나 알렉산드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니콜라이1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며느리를 처음보고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대공부부는 나이가 들면서 사이가 멀어졌는데 그 절정은 대공이 부인을 떠나 대놓고 발레리나와 살림을 차리면서부터라고 합니다. 대공비는 남편에게 복수할 기회만을 노렸구요.

그후, 대공이 뇌졸증으로 쓰러지자, 대공비는 대공을 집으로 데려와 돌봐주면서(!!) 복수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발레리나와 그 자녀들을 못만나게 했다고 합니다. (정말 무서운분이라고 느낀건.....웬수같은 남편을 데려와서 돌보면서 자신은 정말 훌륭한 부인이라는 평판도 얻었을뿐아니라 남편이 진정으로 바라는것이 뭔지 알고, 인내하면서 그것을 방해하는 모습에.........사람은 저렇게 독해야하는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쿨럭..)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의 남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가족사진

...딸인 베라는 남의 집으로 양녀를...--;;;;;;

뒤에 팔짱끼고있는 둘은 큰아들인 니콜라이와 큰딸인 올가

가운데가 대공비 맨 오른쪽에 애안고있는분이 콘스탄틴대공입니다.

대공비 왼쪽에 있는 사람이 콘스탄틴대공의 조카인 로이히텐베르크가문 사람인듯하네요.

(그 귀천상혼한 사람같은데 이름이 기억이..--;;;하여튼 콘스탄틴 대공 누나 아들같습니다...) 

 

세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앞의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인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 대공비입니다.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 대공비

작센-알텐부르크의 엘리자베트

Grand Duchess Elizaveta Mavrikievna  of Russia(in Russian, Елизавета Маврикевна)

HH Princess Elisabeth Auguste Marie Agnes of Saxe-Altenburg

(January 25, 1865 in Meiningen, Germany – March 24, 1927, Leipzig, Germany),

 

옐리자베타 마브리키예브나 대공비는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이자 친척이었습니다. 그녀는 작센-알텐부르크의 모리츠와 작센-마이닝겐의 아우구스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린시절부터 유럽의 수많은 친척들을 방문했었다고 합니다. 16살때 그녀는 자신의 육촌(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와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모리츠가 사촌간이었다고합니다.)인 러시아의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을 처음 만났다고 첫눈에 반해서 결혼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당시 24살이었던 대공은 엘리자베트에게 편지를 자주쓰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합니다. ==;;; 하지만 문학에 재능이 있었던 콘스탄틴 대공은 (그는 KR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했다고합니다.) 엘리자베트를 위한 몇편의 시를 썼다고 합니다.

그녀는 루터파신앙을 지키고 싶어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독실한 정교회신자였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결혼이 확정되고서도 신앙문제는 큰 문제였죠. 결국 결혼식때 그녀는 남편에게 신앙문제로 헤어지지 않을것이며 그만큼 자신이 남편을 사랑한다고 했다고 합니다. 결혼후 옐리자베타 대공비는 '마브라"라는 애칭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후에 콘스탄틴 대공의 비밀일기장이 공개되면서 그가 동성연애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몰래 남자를 만났으며 그것에 언제나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는것이 밝혀졌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동안은 그 사실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옐리자베타와도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은 다른 황족들처럼 옐리자베타 대공비에게도 큰 시련이었습니다. 전쟁직후 가장 뛰어난 아들과 사위를 잃었고, 건강이 안좋았던 콘스탄틴 대공은 이 충격으로 결국 사망하죠. 그리고 혁명직후 아들 셋이 살해당했으며, 대공비와 아이들 둘은 스웨덴을 통해서 겨우 탈출할수있었죠.(스웨덴의 빅토리아 왕비가 초청하는 형식으로 볼셰비키가 그들을 풀어줬다고합니다.)

대공비는 처음에는 스웨덴에 정착했으나, 비싼 물가때문에 벨기에로 옮겨갔고 고향인 알텐부르크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사망했습니다.

 

남편 콘스탄틴대공과 함께있는 옐리타베타 대공비

 

 

 

 

네번째로 소개할사람은 니콜라이1세의 셋째아들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부인인 알렉산드라 표트로브나 대공비입니다.

 

 

 

 

알렉산드라 표트로브나 대공비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

Grand Duchess Alexandra Petrovna of Russia (Russian: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Princess Alexandra Frederika Wilhelmina of Holstein-Gottorp

( June 2, 1838 – April 25, 1900)

 

올덴부르크의 알렉산드라는 올덴부르크의 공작인 페테르와 그의 부인인 나사우의 테레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나사우의 테레제는 스웨덴의 소피아 왕비의 언니죠.

그녀는 올덴부르크 가문 사람이었지만, 할머니가 파벨1세의 딸이자 알렉산드르1세가 가장 좋아했던 동생인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이었습니다. 예카테리나 여대공은 남편이 죽은후 뷔르템베르크의 왕과 재혼했고, 그녀의 아이들은 러시아에서 자랐죠.

알렉산드라는 아버지의 사촌이자 니콜라이1세의 셋째아들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결혼합니다. 알렉산드라는 왕족이었지만, 상류층처럼 옷을 입지 않고 평범하게 옷을 입었으며, 자선사업과 의학에 매우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또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매우 다정하고 상냥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이때문에 그녀에게 많은이들이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는 남편에게 매력적으로 비춰지지 못했고, 대공과 알렉산드라는 두아이를 낳은후 별거하게됩니다. 대공은 극장 무희와 살림을 차렸고 둘사이에 다섯아이가 태어났다고 합니다.

남편이 정부와 그 아이들의 지위를 올려주려 했을때, 대공비는 황제인 알렉산드르2세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황제는 무신경하게 그녀에게 "대공은 자신의 삶에 정점을 즐기고 있소, 하지만 당신꼴을 보시오 옷조차도 제대로 입고있지 않지 않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생에게 좀더 주의하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선사업에 헌신했으며, 스스로 가난한이들을 위해 간호하기도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대공은 그녀에게 이혼하길 요구했지만, 대공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공은 건강이 나쁜 아내가 빨리 죽어서 자신의 형인 알렉산드르2세처럼 정부와 재혼하길 바랬다고 합니다만 대공비는 남편과 그 정부보다 오래살았다고 합니다.--;;(이집형제들 왜이런댑니까....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대공비가 제일 맘에 드는군요..쿨럭..)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알렉산드라 표트로브나 대공비

 

다섯번째로 소개할 사람은 앞의 알렉산드라 표트로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인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대공비입니다. 

 

 

몬테네그로의 아나스타샤

전 로이히텐베르크 공작부인

러시아의 아나스타샤 니콜라예브나 대공비

Princess Anastasia Petrović-Njegoš of Montenegro

(23 December 1868 in Cetinje, Montenegro–25 November 1935 in Cap d'Antibes, France)

 

아나스타샤와 아나스타샤의 언니인 밀리차는 유명한 몬테네그로의 니콜라1세의 딸들입니다. 스타나라는 애칭의 아나스타샤는 처음에 6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인 게오르기 막시밀리아노비치와 결혼했습니다. 게오르기 공작은 니콜라이1세의 외손자로 니콜라이1세의 큰딸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로이히텐베르크공작인 막시밀리안의 아들이었죠.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의 양아들이었던 외젠 드 보아르네와 바이에른의 아우구스테의 아들입니다. 둘사이에 두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지만 둘의 결혼은 굉장히 불행했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샤와 게오르기는 오랫동안 별거했으며, 게오르기는 정부와함께 파리에서 생활하고 부인과는 거의 같이 생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나스타샤는 형부인 표트르 대공의 형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만난후, 그와 결혼하기 위해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이혼한지 6개월후에 니콜라이 대공과 재혼하죠. 둘은 매우 독실한 정교회 신자였고, 매우 행복했다고 합니다.

그녀와 언니 밀리카가 라스푸틴을 황후에게 소개시켜줘서 황실가족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니콜라이 대공은 다른 황실가족들과 군에게 언제나 신임받는 인물이었죠. 아나스타샤는 마리야 황태후와 함께 러시아를 탈출했다고 합니다.

 

 

 

스타나의 두번째 남편

러시아의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니콜라이1세의손자)

 

여섯번째역시 알렉산드라 표트로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인 밀리챠 니콜라예브나 대공비입니다.

 

 

 

몬테네그로의 밀리카

러시아의 밀리챠 니콜라예브나 대공비

Princess Milica Petrović-Njegoš,

Grand Duchess Militza

(14 July 1866 Cetinje, Montenegro - 5 September 1951 Alexandria, Egypt)

 

밀리카는  위의 아나스타샤의 언니입니다. 러시아의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결혼했습니다. 결혼 당시 그녀는 러시아 대공에게 시집갈만큼 아주 유력한 가문출신이 아니라고 여겨졌기에, 둘은 아마도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여겨집니다. 

밀리카와 동생 아나스타샤는 후에 니콜라이2세의 황후인 알렉산드라에게 신비주의를 가르쳐줬으며, 특히나 라스푸틴을 황후에게 소개시켜준 인물들로 유명합니다. 때문에 다른 황실가족들이 둘을 안좋게 봤다고 합니다. 밀리카와 표트르 대공사이에는 모두 네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밀리카의 남편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대공 

 

 

 

 일곱번째로 소개할 대공비는 니콜라이1세의 막내며느리가 되는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입니다. 그녀는 바덴의 체칠리에대공녀로 태어났습니다.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 

바덴의 체칠리에 대공녀 

Grand Duchess Olga Feodorovna of Russia

(Karlsruhe, 20 September 1839 - Kharkov, Russian Empire 12 April 1891)

이 그림 역시 빈터할터의 그림인데 원 그림은 2차대전때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니콜라이1세의 막내며느리였던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는 바덴의 대공인 레오폴트와 그의 부인인 스웨덴의 소피아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대공비의 외할아버지는 스웨덴의 쫓겨난 국왕이었던 구스타프4세 아돌프였죠. 그녀의 원래 이름은 체칠리에였는데, 정교회로 개종하면서 정교회식이름인 올가 표도로브나 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녀의 남편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코카서스의 총독으로 20여년간을 지냈고, 가족들은 모두 그곳에서 지냈다고합니다. 모두 일곱아이들을 두었는데 고명딸인 아나스타샤 여대공은 후에 메클렌부르크-슈벨린의 대공비가 되었고, 아나스타샤의 딸인 알렉산드린과 체칠리에는 각각 덴마크의 왕비와 독일의 황태자비가됩니다.

그녀는 아들인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메렌베르크 백작녀인 조피와 귀천상혼한것에 충격받아서 쓰러졌고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을때까지 아들을 용서하지 않았고, 미하일 대공은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것조차 허락받지 못햇다고 합니다.

(참고로 조피는 나사우 공작의 아들이자 스웨덴의 소피아 왕비의 오빠인 니콜라우스와 그의 귀천상혼한 부인인 나탈리야 푸쉬키나의 딸입니다. 나탈리야 푸쉬키나는 푸쉬킨의 딸로 당대 유럽 최고의 미녀라는 찬사를 듣던 여성이라고 합니다.)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남편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여덟번째로 소개할 대공비는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인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대공비입니다.

 

 

 마리아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

그리스의 마리아 공주

Grand Duchess Marie Georgievna of Russia(Мария Георгиевна)

Princess of Greece and Denmark

(March 3, 1876-December 14, 1940),

 

마리야 게오르기예브나 대공비는 그리스의 게오르기오스1세와 그의 부인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의 둘째딸로 태어났습니다. 알렉산드르2세의 아들인 파벨대공과 결혼한 알렉산드라 대공비가 바로 마리아의 언니죠.

마리아는 그리스를 떠나는것을 원치 않았지만, 그녀가 그리스 평민과 결혼하는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청혼자들중 가장 적당한 사람인 어머니의 사촌이자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들인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대공과 결혼을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에 게오르그 대공을 만났을때 그와의 결혼에 관심이 없다는것을 명확하게 했다고 합니다. 또 자신이 그를 사랑해서 결혼하는것이 아니라는것도 분명히 했다고 하죠.

어머니인 올가 왕비가 러시아를 늘 그리워했던것처럼 마리아는 고향인 그리스를 늘 그리워했다고 합니다. 왕비인 어머니와는 달리 왕위계승권가 먼 대공비였기에, 그리스에 자주 갔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영국에 있는 학교에 다니자 마리아는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과 함께 지내기로 합니다.

마리아가 남편을 떠나온 몇달후 1차대전이 일어났고, 마리아는 전쟁초기 러시아로 돌아갈 기회를 놓쳤기에 러시아로 갈수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게오르그 대공은 혁명중 살해당합니다.

마리아는 남편이 죽은후 그리스의 제독과 재혼했고 고향인 그리스에서 사망했습니다.

마리아의 딸인 크세니아 공녀는 후에 미국의 부호와 결혼해서 리즈부인으로 알려져있으며, 안나앤더슨의 후원자로도 유명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대공비 역시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의 며느리인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비입니다. 그녀는 태어날때부터 이미 GrandDuchess였죠. ^^*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대공비

크세니아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Xenia of Russia

Ея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 Великая Княжна Российская 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Ея Императорское Высочество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Российская Ксен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April 6, 1875 – April 20, 1960)

 크세니아 대공비는 러시아의 알렉산드르3세와 그의 황후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의 큰딸로 태어났습니다. 크세니아 여대공이 태어났을때, 할아버지인 알렉산드르2세는 손녀딸이 태어난것에 매우 기뻐했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가족과 늘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크세니아는 숙부인 세르게이 대공이 결혼할때 처음으로 후에 올케가 되는 헤센의 알릭스를 만났고, 둘은 매우 친해졌다고합니다.

크세니아는 어린시절부터 자신보다 9살 연상인 오촌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대공을 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그를 매우 좋아했고, 15살이 될무렵에는 그와 결혼하길 원했다고 합니다. 크세니아의 부모는 딸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해서 결혼을 만류했지만 결국 크세니아가 20살이 되기전인 1894년 결혼을 합니다.

크세니아와 알렉산드르는 결혼초 매우 행복했다고 합니다. 둘사이에는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났고, 둘의 그중 여섯은 남자아이였습니다.(그래서 아마도 튼튼한 아들 여섯을 가진 어머니였던 크세니아를 올케인 알렉산드라가 부러워했을꺼라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하지만 둘의 사이는 멀어집니다. 크세니아가 막내를 임신하고 있을때 알렉산드르는 다른 여인과 연애사건을 일으키죠. 그리고 크세니아도 한 영국인과 사랑에 빠집니다. 둘은 서로의 연애사건을 알게되었고, 결국 둘은 서로 점점 떨어져지내게 됩니다. 이런 불화는 둘을 러시아 궁정에서 멀리 떠나게 만들었고, 둘은 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합니다.

1차대전 직전에  외국에 있었던 크세니아와 남편 알렉산드르는 전쟁직후 러시아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고 크세니아와 그 가족은 어머니 마리야 황후와 함께 머물고 있다가 이모 알렉산드라 왕비가 보낸 전함을 타고 겨우 탈출할수 있었죠.

마리야 황태후가 올가를 데리고 덴마크로 돌아갔던 반면 크세니아는 조지5세가 제공한 집에서 지냈습니다. 조지5세는 사촌인 니콜라이2세와 그 가족을 구하지는 못했지만, 이모와 나머지 사촌들에게 할수있는 범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중에는 경제적 도움이 매우 중요했죠. (개인적으로는 조지5세가 죄책감을 가졌을것도 같습니다. 니콜라이2세가족의 망명만 허용했어도 짜르 일가가 그렇게 죽진 않았을테니까요..하지만 조지5세는 영국이 공화정이 될까봐 노심초사하던 인물이라...의회나 수상이 반대하는 일을 절대하려하지 않았죠. 그렇기에 어쩌면 대부분의 왕가가 몰락하던 가운데 영국왕가가 버틸수있었을것도 같구요.)

크세니아는 조지5세가 제공한 집에서 여러친척들을 만나면서 조용히 살다가 사망했습니다.

 

남편 산드로와 아이들과 함께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사진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