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러시아

러시아의 대공비들...4.예카테리나2세와 여제의 두 며느리들

엘아라 2009. 3. 29. 09:25

으..드디어 파벨1세까지 왔군요.

음냐 솔직히 니콜라이1세이전의 로마노프가는 좀 복잡다난하다죠.-0-;;;

툭하면 쿠데타에 황제의 권력은 약하고 귀족들은 아주아주 강하고 말입니다.

..뭐 파벨1세의 아들인 니콜라이1세때 완전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지만요...-0-;;;

 

표트르 대제의 딸이었던 옐리자베타 여제는 자신의 후계자로 언니 안나의 아들을 지명했습니다. 그는 후에 러시아의 표트르3세가 되죠. 표트르3세의 가계는 홀슈타인-고토로프 가문으로 덴마크 왕가에서 분가한 오래된 유럽의 통치가문중하나였죠. 특히 표트르3세는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 러시아의 황위계승자로 지명되었지만, 할머니의 계승권(스웨덴의 공주)으로 스웨덴 왕위계승권도 가지고 있었고, 스웨덴의 울리카 엘레노라 여왕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죠. 만약 그가 러시아의 황제가 되지 않았다면 스웨덴의 국왕이 되었을껍니다. (...... 불행한 표트르3세는 알고보면 어쨌든 왕이나 황제가 될 운명이었던겁니다....차라리 스웨덴 국왕이 되었으면 더 나았을듯하죠...-0-;;;;)

 

옐리자베타 여제는 조카이자 후계자인 표트르의 부인으로 안할트-제르브스트의 조피공녀를 선택합니다.결혼후 조피는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얻었고, 후에 예카테리나2세로 즉위합니다.

(.....이후 대공비들 이름에 예카테리나라는 이름이 없는 이유가 있군요...두명의 예카테리나 황후가 다 여제로 즉위했으니 말입니다.)

 

 

 

 

안할트-제르브스트의 조피 프리데리케 공녀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황후

예카테리나2세(또는 예카테리나 대제)

Sophie Friederike Auguste von Anhalt-Zerbst-Dornburg

Catherine II, called Catherine the Great

(Russian: Екатерина II Великая, Yekaterina II Velikaya)

( 2 May [O.S. 21 April] 1729 – 17 November [O.S. 6 November] 1796)

 

 안할트-베르브스트의 조피는 안할트-제르브스트의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와 홀슈타인-고토로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조피의 어머니인 요한나는 옐리자베타 여제의 언니인 안나 여대공과 결혼했던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의 사촌이었죠. (때문에 표트르3세와는 육촌관계가 됩니다.) 또 그녀는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아돌프 프레데리크의 동생이었고, 일찍 죽은 그녀의 오빠인 카를은 옐리자베타 여제와 한때 약혼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피가 황위 계승자의 부인으로 선택된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였다고 합니다.

표트르와 결혼한후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 대공비라는 이름을 받은 그녀는 결혼후 한동안 아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후 여제가 아들에게 남긴 문서에는 표트르가 자신을 거절했다고 주장합니다만 여제가 결혼한지 얼마 안되었을때 남편이 보낸 편지에는 그런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 옐리자베타 여제는 후계자가 없다면 예카테리나도 필요없다고 압력을 넣었으며, 이후 아들인 파벨이 태어납니다.

예카테리나의 남편인 표트르는 고향을 무척이나 그리워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존경했다고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강력한 왕권으로 신하들을 장악한 그를 부러워한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당시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황제의 권력보다 권신들의 권력이 더 강했기때문이죠. 그나마 표트르 대제가 궁정을 장악한 이후 좀 덜했지만, 대제 사후의 후계자 문제로 다시 귀족들의 힘이 강화되고 있었죠.

반면 예카테리나는 철저하게 러시아인이 되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남편보다 러시아를 더 잘 이해했으며 때문에 더 많은 러시아 귀족들에게 호감을 얻을수 있었죠. 이것은 그녀가 권력을 장악하는데 절대적으로 도움이 되었다고합니다.

예카테리나와 표트르는 내내 불행했으며 결국 서로 권력을 얻기 위해 대립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특히 표트르가 황제가 된후, 그는 부인을 궁정에서 몰아낼 계획을 세우죠. 하지만 이 계획은 예카테리나에게 먼저 알려지고, 그녀는 황제보다 먼저 행동을 개시해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황제를 유폐시킨후 스스로 여제가 됩니다. (황제는 예카테리나의 정부중 한명에게 살해당합니다.)

 

젊은 시절의 예카테리나

 

 

예카테리나의 남편 표트르3세

 

표트르3세와 예카테리나2세

그리고 둘의 아들 파벨1세

(셋다 황제가 되시는군요..) 

 

 

파벨1세는 두번결혼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그가 황제가 되기전 사망했죠.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헤미네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대공비

Princess Wilhelmina Louisa of Hesse-Darmstadt
The Grand Duchess Natalia Alexeievna of Russia
(Наталья Алексеевна ,25 June 1755 - 15 April 1776)

 

 

파벨1세는 어머니 예카테리나2세의 명에 따라 후계자를 얻기 위해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헤미네와 결혼합니다. 파벨1세와 결혼한 빌헤미네는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 대공비라는 이름을 얻었죠. 나탈리야는 무척이나 아름다웠고 파벨1세는 부인을 무척이나 사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궁정은 자유로운 연애가 일상화 되었기에, 빌헤미네 역시 남편말고 애인이 따로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러시아어를 못했기에 궁정에서 무척이나 외로웠고, 남편인 파벨에 대해서 무척이나 실망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임신했을때, 모두들 아이가 파벨의 아이가 아니라 파벨의 친구이자 나탈리야의 연인의 아이라고 수근댔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계자를 원했던 예카테리나2세는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합니다.

나탈리야는 첫아이를 낳다가 아이와 함께 사망했다고 합니다. 파벨1세는 부인의 죽음에 매우 슬퍼했지만, 여제는 후계자를 얻기 위해 1년도 안되어서 아들에게 재혼을 명다고합니다.

 

 

 

 

 

 

첫번째 부인이 죽은후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곧 재혼합니다.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Princess Sophie Marie Dorothea Auguste Louise of Württemberg

Maria Feodorovna (Russian: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25 October 1759 – 5 November 1828)

예카테리나2세가 규정한 성 예카테리나 훈장의 대리 단장 복장이라고 합니다.

(앞쪽 성 예카테리나 훈장에 대한 포스트를 참조해주세요.)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는 뷔르템베르크의 공작 프리드리히2세와 그의 부인인 브란덴부르크-슈벳트의 프레데리케 도로테아 조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 그녀는 평균이상의 교육을 받았고, 열여섯살이 되었을때는 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라틴어를 할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키크고 밝으스레한 볼을 가진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성장했다고 합니다. 성격은 강인했지만, 부드럽고, 사려깊으며 순수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예카테리나2세가 파벨1세의 신부감을 찾을때 그녀역시 신부후보였다고 합니다만 겨우 14살이었고, 파벨1세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헤미네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헤센-다름슈타트의 루드비히(빌헤미네의 오빠)와 약혼했습니다. 하지만 파벨1세의 부인인 나탈리야가 사망하자 프로이센의 국왕은 조피 도로테아를 파벨1세의 부인감으로 추천합니다. 헤센-다른슈타트의 루드비히는 결국 약혼을 깨는것을 허락했다고 합니다. 예카테리나2세는 자신과 비슷한 교육을 받고, 이름(조피)와 태어난곳( Stettin)이 같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고, 조피 도로테아와 파벨1세는 베를린에서 만납니다. 처음 만났을때 조피 도로테아는 파벨을 "미친듯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첫번째 아내를 잃은지 얼마 안되었던 파벨은 좀더 신중했다고 합니다. 조피 도로테아는 파벨과 결혼하면서 정교회식으로 마리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마리야 표도로브나는 평생 남편을 진실되게 사랑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벨은 항상 그렇지 못했죠. 마리야는 시어머니인 예카테리나와 결혼초에는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여제는 며느리를 마음에 들어했죠. 하지만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의 불화는 마리야 역시 시어머니와 사이가 멀어지게되는 계기가 됩니다. 마리야가 둘 사이를 좋게 하려는 의도는 둘다에게 오해를 사고는 했죠.

마리야는 1777년과 1779년 두 아들인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을 낳습니다만, 예카테리나 여제는 교육을 위해 겨우 석달된 두 손자를 부모에게서 빼앗아가서 자신의 곁에 두고 양육합니다. 마리야와 파벨은 아이들을 겨우 일주일에 한번정도 아이들을 만나게 허락받죠. 때문에 두 아이가 태어난 후 몇년간 마리야와 파벨사이에는 아이들이 없었다고 합니다.(.....또 아이들을 뺏길까봐 그런듯..ㅠ.ㅠ) 하지만 이후 파벨과 마리야는 모두 여덞명의 아이들을 더 낳았는데 여섯명의 딸을 낳은후 두명의 아들을 낳았죠. 예카테리나2세는 딸들은 부모와 함께 사는것을 허락해서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부모 밑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두 아들인 니콜라이는 여제가 죽은해에 태어났고, 미하일은 여제가 죽은후에 태어났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사이가 점점 좋아지지 않으면서 둘은 거의 고립되어갔고, 마리야는 남편을 위해 친구들과 가족들을 불러서 연극과 음악공연을 하고는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둘사이는 조금씩 멀어져갔는데 특히나 마리야의 시녀와 파벨이 연애사건을 일으키면서 마리야는 큰 실망을 했다고 합니만 곧 남편을 사랑했던 마리야는 둘사이가 단지 플라토닉 러브라는 남편의 말을 굳게 믿었다고 합니다.

시어머니 사망후 남편이 황제로 즉위하자 마리야 역시 황후가 됩니다. 그녀는 황후가 된후 가난한 친척들을 돕는데 무척이나 힘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는 점점 나빠지기 시작했는데 특히나 막내아들을 낳은후 파벨1세가 한 여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더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파벨이 황제가 된지 4년이 좀더 지났을때 그는 신하들에 의해서 살해당하죠. (파벨1세의 아들인 알렉산드르가 이 일을 묵인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죽이지 않는 조건이었다고 합니다만 결국 파벨1세는 살해당했고, 신하들은 술에 취해 죽은 황제의 시신을 마구 밟았다고합니다. 후에 알렉산드르1세가 신비주의에 몰입하게된 것도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죄책감때문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남편이 죽은후 마리야는 황태후가 되었고, 궁정에서 제일 높은 지위의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궁정에서는 황태후가 황후보다 더 높은 지위의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궁정의 모든일을 관리했으며 그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마리야는 좋은 어머니였고,자신의 모든 아이들과 잘 지냈다고 합니다.

 

 

상복차림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나탈리야와 마리야의 남편 파벨1세 

 

자료출처: 위키피디어

그림출처:위키미디어 커먼스, 위키 피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