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음냐....대충 나바라를 끝낸것같은데...
맺음말을 써야할지 어떨지 고민이군요.
머리가 텅텅비어서 맺음말이 잘 안써지는데 말입니다. .ㅜㅠ
나바라의 인판타들...(50) 나바라의 후아나 3세 :엔리케 2세의 딸(두번째)
나바라의 후아나 3세
잔 달브레
Jeanne d'Albret
(Basque: Joana Albretekoa; Occitan: Joana de Labrit;)
(16 November 1528 – 9 June 1572),
첫번째 결혼이 무효화 된 후에 후아나는 여전히 프랑스 궁정에서 지내게 됩니다. 후아나는 외삼촌인 프랑수아 1세가 사망하고 사촌인 앙리 2세가 즉위한 후인 1548년 다시 재혼합니다. 후아나가 재혼한 상대는 프랑스 왕가의 분가인 부르봉 가문 출신인 앙투안 드 부르봉이었습니다. 앙투안과 후아나의 결혼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문제였다고 합니다만, 후아나의 입장에서는 사랑에 빠져서 결혼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앙투안은 후아나에게 그다지 충실하지 않은 아내였으며 특히 정부를 만나러 자주 베아른에 아내를 두고 떠났었습니다. 아마도 이미 어린시절부터 독립적이었던 후아나는 남편의 이런 행동에 대해서 자신의 지위를 확실히 하는 것으로 참을수 밖에 없었을 듯합니다.
1555년 아버지 엔리케 2세가 사망한뒤, 남편과 함께 나바라의 군주로 즉위합니다. 이때까지 후아나는 가톨릭을 믿고 있었지만 그녀는 어머니인 마르거리트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았으며 개신교에 매우 관심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남편인 앙투안과 마찰을 빚는 계기가 되는데 앙투안의 경우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갈등을 했었는데 특히 그의 정부였던 루이즈 드 라 베라우디에르는 앙투안이 가톨릭으로 마음을 굳히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여왕으로 자신의 권리를 잘 알고 있었으며 아마도 나바라의 종교를 가톨릭에서 칼뱅파로 바꾸기로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를 밀어붙이게 되죠. 후아나는 나라의 종교를 완전히 뒤바꾸었고 이것은 가톨릭에서 그녀에 대해서 적개심을 갖는 계기가 됩니다. 또 후아나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못했는데 후아나는 카트린이 상인의 딸이라고 비웃었던 사람들중 한명이라고도 합니다.
1562년 프랑스의 종교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톨릭세력과 개신교 세력의 갈등이 심화되어서였습니다. 후아나의 남편인 앙투안은 가톨릭을 지지했었지만 후아나는 확고히 개신교도였으며 결국 후아나는 가톨릭파에 합류하길 거부합니다. 그녀는 파리를 떠나 안전한 나바라로 갔었는데 가는 도중에 앙투안의 조상이 묻혀있는 방돔의 교회가 위그노에게 약탈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남편인 앙투안은 아내의 책임이라 여기고 아내를 수녀원으로 보내버리려했다고 합니다. 이후 부부는 앙투안이 죽기 전에 만나게 됩니다. 앙투안은 위그노가 점령한 루앙을 공격하는데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격도중에 죽게 상처를 입었고 상처가 악화되어서 사망합니다. 후아나는 남편이 죽기 전에 만나볼수는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죽은 뒤 후아나는 이제 나바라의 단독 통치자가 됩니다. 물론 아들인 엔리케(앙리)가 있었지만 미성년으로 어렸기에 그녀가 나바라를 통치했던 것입니다. 종교전쟁은 계속되고 있었으며 나바라는 신교측으로 참전하고 있었습니다. 후아나의 아들인 엔리케는 자라면서 군인이 되었으며 개신교도로 가톨릭 군대에 맞서게 되죠. 아마 아들이 참전하는 동안 후아나는 여전히 왕국을 통치했을 듯합니다.
나라가 혼란했었기에 결국 프랑스 국왕의 모후였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나바라의 여왕인 후아나는 서로 평화협정을 맺으려합니다. 그리고 이 평화협정을 위해서 결혼협정을 체결하려하죠. 이 평화협정을 위해서 후아나의 아들인 엔리케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인 마르거리트 (마고)를 결혼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물론 후아나는 문란했던 프랑스 궁정에서 자라고 행동하는 마르거리트에 대해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아들의 결혼을 위해서 파리에 머물렀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아프게 되었으며 결국 아들의 결혼식이 열리기 두달전에 사망합니다. 후아나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합니다.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총애한 조향사가 만든 독이 든 향수를 뿌린 장갑을 카트린이 선물로 보냈고 이에 후아나가 독살당했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후대에 조사해본 결과 후아나는 독살당한것이 아니라 병으로 사망한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후아나의 아들인 엔리케는 19살에 나바라의 국왕이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죽은 두달후쯤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인 마르거리트와 결혼합니다. 결혼식 축제가 진행되던 중 성 바르톨로뮤의 날에 학살이 일어났으며 이것은 프랑스와 나바라, 가톨릭과 위그노 사이의 평화를 깨버린 사건이기도 했었습니다.
후아나는 앙투안 드 부르봉과의 사이에서 다섯아이를 낳았습니다. 그중 아들인 엔리케(앙리)와 딸인 카트린 드 부르봉만이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아들인 엔리케는 어머니의 뒤를 이어서 나바라의 국왕이 되었을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가의 제 1분가인 부르봉 가문 출신이었기에 발루아 가문의 남성 직계후손이 단절되면서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아서 프랑스의 앙리 4세가 됩니다. 딸인 카트린 드 부르봉은 오빠인 앙리 4세가 오래도록 가톨릭세력과 전쟁을 하는 동안 나바라에 머무르면서 나바라의 섭정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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