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아무생각이 없긴 하지만 일단 그냥 한번 써봐야겠습니다. -0-;;;
나바라의 인판타들...(52) 마치며
나바라 왕국은 9세기말경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바스크족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나바라 왕국은 기독교 왕국이긴 했지만 출발에서는 다른 이베리아 반도의 국가들과는 좀 다른 양상이었습니다. 팜플로나는 프랑스와 이베리아 반도를 잇는 중요한 곳이었으며 이때문에 기독교도와 이슬람 세력 모두 중요하게 여겼으며 또 서로 이곳을 장악하려고 했었죠.
특히 같은 기독교 세력이었음에도 팜플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에 대해서 이슬람과 연합할것을 우려해서 강압책을 쓰기도 했었기에 아마 이런 상황은 도리어 나바라 왕국초기 이슬람 세력과 잘 지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이때문에 팜플로나 출신의 기독교 인판타들이 이슬람 궁정의 하렘에 들어갔었으며 무슬림 통치자의 선조가 되기도 합니다.
나바라는 이베리아 반도의 다른 국가들처럼 초기부터 여성의 계승권리를 인정해줬었습니다. 이때문에 팜플로나 왕국 후에 나바라 왕국이 되는 이 왕국은 자주 인판타들에게 상속권리가 넘어갔었습니다.
나바라 왕국도 이베리아의 다른 국가들처럼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국가들과 통혼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여성계승자가 나오면서 바로 곁에서 통합의 위협이 되는 이베리아 반도 내 국가드과 통혼하기보다는 좀더 떨어져있지만 도움이 될만한 프랑스 세력과 협력관계가 됩니다.
특히 13세기 상파뉴 가문과 통혼하면서 상파뉴 백작이 어머니를 통해서 나바라의 상속권리를 받게 되면서 프랑스와의 강한 연결고리가 시작됩니다. 특히 후아나 1세가 프랑스의 국왕 필리프 4세와 결혼하면서 나바라 왕위는 프랑스 왕가와 연결되었으며 이후 프랑스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게 됩니다.
물론 나바라에서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너무 강해지는 것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도 100년 전쟁이 일어나는 등의 일이 생긱면서 나바라에 대한 통제가 느슨해지게 되죠. 하지만 나바라 왕가는 여전히 프랑스와 자주 통혼을 했으며 프랑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컸었죠.
나바라의 상황이 특히 나빠지게 된것은 아마도 아라곤의 국왕이 되는 후안이 나바라의 여왕 블란카와 결혼하면서였을 것입니다. 후안은 야심 가득한 인물이었기에 아내가 자신보다 미리 죽었을때 당연히 아들인 카를로스에게 나바라 왕위를 물려줘야했음에도 권력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결국 내전까지 일어나게 만듭니다. 그리고 다른 자녀들 역시 자신의 나바라 통치 권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가차없었죠. 이런 상황은 후안의 아들인 페르난도 2세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결혼해서 둘이 이베리아 반도 내 거대한 연합왕국을 만들면서 나바라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나바라는 다시 프랑스와의 통혼을 통해서 이베리아 반도 내의 국가를 견제하려했었지만, 너무나 커진 연합왕국을 버텨내기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후안은 죽을때까지 자신의 권력을 놓지 않았으며, 후안이 죽은 뒤 그의 딸인 레오노르 역시 아버지가 죽은 직후 사망하고 다시 나바라의 왕위는 어린 손자 손녀에게 돌아가면서 내분에 휩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상황을 노린 에스파냐쪽에서 결국 팜플로나를 중심으로하는 나바라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게 되죠.
나바라 왕국의 영지는 베아른을 중심으로하는 프랑스쪽 영지 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것은 나바라 왕국이 프랑스에 더욱더 의존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프랑스 왕가와의 지속적인 통혼은 나바라 왕위계승자들이 더욱더 프랑스에 의존할수 밖에 없게 만들게 됩니다.
나바라의 여왕이었던 후아나 3세(잔 달브레)는 외삼촌인 프랑스 국왕의 보호아래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었으며, 프랑스 국왕의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후아나는 자신의 권리등을 알았고 나바라의 여왕으로 자신의 행동을 하게 되죠. 물론 그녀도 프랑스 왕가의 방계 가문인 부르봉 공작 가문 출신인 앙투안 드 부르봉과 결혼해서 프랑스와의 연결고리를 강화합니다만, 그것이 그녀가 프랑스의 정책에 끌려다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후아나 3세는 가톨릭에서 칼뱅파로 개종해서 프랑스 왕가의 정책에 반대되는 행동을 했으며 나바라의 독자적 종교 이념으로 삼았었습니다.
물론 나바라는 프랑스 왕국에 비하면 매우 작은 나라였으며, 프랑스 내에서 위그노들의 활동이 활발하다고 하더라도 전통적인 가톨릭 세력이 더 강했었기에 나바라와 프랑스가 갈등을 빚으면 나바라에 불리한 것이 사실이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프랑스 왕위계승문제와 연결되면서 더 복잡해지게 됩니다. 후아나 3세의 아들인 엔리케(앙리)는 부르봉 공작 가문의 수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앙리 3세가 후계자가 없고, 살리카법을 적용하는 프랑스 왕가에서 결국 왕위를 이을 사람은 발루아 왕가의 가장 가까운 분가인 부르봉 공작 가문으로 돌아가게 되고, 바로 후아나 3세의 아들인 엔리케였던 것입니다.
결국 나바라의 국왕 엔리케 3세는 오래도록 개신교로 가톨릭 세력과 대립했었지만, 결국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국왕이 되었고 바로 그가 부르봉 왕가의 첫번째 국왕인 앙리 4세가 됩니다.
앙리 4세이후 프랑스 국왕들은 당연히 나바라의 국왕 지위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전에 에스파냐에 합병된 지역 외 나머지 나바라 지역은 결국 프랑스 왕국에 완전히 합병되었습니다. 그리고 살리카 법을 상속법으로 정했던 프랑스에서 더이상 여성 후계자는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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