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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45) 바이에른의 유디트 :루이 르 피우스의 아내 (첫번째)

엘아라 2020. 6. 4.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흑....베르됭 조약 좀있으면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도 막 갈라지는...ㅠ.ㅠ

그래도 힘내서 벌써 9세기입니다. 곧 카페왕가가 머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왕비들...(45) 바이에른의 유디트 :루이 르 피우스의 아내 (첫번째)

 

바이에른의 유디트

루이 르 피우스의 두번째 아내

Judith (797– 19 April 843),

 

 

루이 르 피우스로 프랑크 왕국의 왕비이자 제국의 황후였던 바이에른의 유디트는 790년대 후반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중세 초기 왕가의 여성들은 상당수가 일찍 결혼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인데 교회에서 최소결혼연령으로 정했던 12살만 지나면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더어릴때도 결혼하지만 그땐 교회법상 무효로 할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이때문에 유디트의 나이를 추정할때 800년대 후반까지도 출생연도를 추정하기도 한다고 합니다만 일반적으로는 그녀가 아마도 20대에 루이와 결혼했다고 추정하고 있으며 이때문에 790년대 후반에 그녀가 태어났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디트의 부모는 작센과 바이에른쪽의 고위 귀족으로 추정되는데 특히 유디트는 유럽의 왕가중 한 가문이 되는 벨프 가문의 선조로 알려진 바이에른의 백작 벨프의 딸로 알려져있습니다. 벨프 가문은 사실 원래 거주하던 곳에서 영향력을 잃었었는데 유디트가 루이 르 피우스의 아내가 된 이후 제국에서 영향력있는 가문이 된다고 합니다.

 

818년 10월 루이 르 피우스의 첫번째 아내인 에멘가르드가 사망한뒤, 819년 연말에 루이는 유디트와 재혼합니다. 41살이었던 루이는 20대였던 유디트와 재혼했습니다. 몇몇 기록에서는 유디트가 너무나 아름다웠으며 음악등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에 루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합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정략적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유디트의 가문은 근거지에서 밀려났었는데 이들의 본거지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이 컸었다고 합니다. 결혼후 유디트는 전통대로 대관했다고 합니다. 

 

루이

 

유디트는 결혼후 아마 처음에는 궁정에서 적응하면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으리라 추정합니다. 하지만 많은 중세 여성들처럼 유디트의 이런 상황은 그리 많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대신 그녀가 아들인 샤를 (대머리왕 샤를)을 낳고 난 뒤 왕위계승문제에 관여하면서 그녀가 정치적으로 부각되기에 그녀가 아들을 위해서 야심 가득해서 정치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관한 황후로써 유디트는 루이와 함께 나라를 통치해야했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궁정을 가지고 남편이 부재시에 궁정을 주재하면서 통치행위를 했었는데 이것은 후대에도 흔하게 나타나는 상황이기에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녀가 이렇게 얻은 권력을 아들을 위해서 썼던 것 역시 사실일것입니다.

 

유디트는 루이 르 피우스와의 사이에서 두명의 자녀를 얻습니다. 첫째는 결혼 다음해인 820년에 태어나는 기젤라라는 이름의 딸로 기젤라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프리울리 공작 에베르하르트(후에 성인으로 시성되어서 성 에베르하르트)와 결혼했으며 둘 사이에서 여러 자녀가 태어나는데 아들인 베렌가리오(베렌가리우스)는 이탈리아의 국왕이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디트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자녀는 아마도 둘째이자 유일한 아들이었던 샤를일것입니다. 823년 샤를이 태어나자 유디트는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샤를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일을 하게 됩니다. 아마 그녀는 장성한 이복형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어렸고 막내였기에 상속지위는 물론 여러가지로 형들보다 못할것을 우려했었을듯하빈다만 결국 이것은 카롤링거 왕가의 내분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유디트의 아들 샤를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