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쓰다보니 참 많은데 사실 자료를 더 찾았거든요. 그런데 읽기가 싫습니다. 흑
나바라의 인판타들...(35) 나바라의 블란카 : 카를로스 3세의 딸 (두번째)
나바라의 블란카
시칠리아의 왕비
나바라의 여왕
Blanche I
(6 July 1387 – 1 April 1441)
블란카는 1415년 나바라로 돌아왔으며 나바라로 돌아온후 그녀는 왕위계승자가 되었으며 나바라의 귀족들이 그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합니다. 왕위계승자로 블란카는 당연히 후계자를 낳아야할 의무가 있었으며 남편감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블란카는 이제 나바라의 상속녀였으며 그녀의 지위는 매우 중요했었기에 남편감을 찾는 문제 역시 상당히 복잡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는 결국 1419년 야심 가득한 "아라곤의 인판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는 아라곤의 후안과 결혼하게 됩니다.
아라곤의 후안은 원래 카스티야의 왕자로 태어났습니다. 후안의 아버지인 페르난도는 카스티야의 국왕 주앙 1세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만 페르난도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레오노르는 아라곤의 공주로 블란카의 첫번째 남편인 마르티노의 고모이기도 했었습니다. 아라곤 왕가의 남성 직계가 단절되면서 페르난도는 외삼촌의 뒤를 이어서 아라곤의 왕위는 물론 시칠리아 왕위도 얻었던 것이었죠.
사실 페르난도가 왕위에 오르기전에 이미 형인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가 일찍 죽고 조카인 카스티야의 후안 2세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페르난도와 그의 아들들은 카스티야에서 권력을 장악하려했었습니다. 게다가 혼인 관계를 통해서 포르투갈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었죠. 카스티야에서 "아라곤의 인판타들"이라고 불렸던 페르난도의 아들들은 아라곤과 카스티야는 물론 포르투갈과 나바라까지 영향력을 행사해서 가문이 이베리아 반도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던 것입니다.
블란카의 아버지인 카를로스 3세는 후안의 형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는 결국 협정을 체결했으며 블란카와 후안의 결혼을 결정합니다. 재미난 것은 블란카보다 10살이상 어린 후안이 이미 블란카를 보고 반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블란카가 시칠리아 왕국에 있을때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시칠리아로 왔던 후안이 블란카의 아름다움을 보고 반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1419년 결혼서약서가 체결되고 1420년 팜플로나에서 블란카와 후안의 결혼식이 열리게 됩니다. 재미난 것은 이 결혼식때 블란카가 남성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에 대해서 후안의 지위를 명확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후안이 나바라의 왕위를 차지하는데 중요한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블란카는 후안과의 사이에서 아들인 카를로스와 세명의 딸인 후아나, 블란카, 레오노르를 낳습니다. 이중 후아나는 어려서 사망했지만 나머지 세 아이들은 성인으로 성장합니다. 그리고 1425년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면서 블란카는 나바라의 여왕이 되었으며 그녀의 남편인 후안은 아내의 권리를 통해서 나바라의 국왕이 됩니다.
후안은 비록 나바라의 왕위를 얻었지만 여전히 카스티야에서의 권리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그의 형인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함께 카스티야 내정에 관여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형과 마찬가지로 그는 나바라의 국왕이라는 권리를 가지고 카스티야를 압박하게 되죠.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나 블란카가 나바라에 덜 신경을 쓰는 원인이 되었으며 오래도록 부부는 카스티야에 있었기에 대관식은 1429년에야 이뤄지게 됩니다.
이후 후안과 그의 형제들은 여전히 카스티야 내에서의 이익을 가지려했고 이것은 결국 아라곤-나바라 등이 카스티야와 갈등을 빚는 원인이 되었으며 내전과 더불어 이 두나라들과 싸우는 계기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승리는 카스티야쪽이었으며 후안과 그 형제들은 카스티야에서의 권리를 포기해야했었으며 평화를 위해서 블란카와 후안의 딸인 나바라의 블란카가 카스티야의 왕위계승자였던 엔리케와 결혼하기도 했었습니다.
블란카는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왕위나 권리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남편의 뜻을 따랐습니다. 그것이 중세시대에는 여성의 미덕이었으며 블란카 역시 이런 미덕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녀는 주로 중재자 역할을 자주 했었다고 하는데 특히 딸인 블란카가 카스티야로 시집갈때 참석했었으며 남편과 카스티야 귀족간의 중재에도 관여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블란카는 1441년 사망합니다. 재미난 것은 그녀의 매장 장소가 애매했는데 그녀가 원하는 곳에 묻히지도 못했으며 이장명령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었습니다. 이때문에 후대에 블란카의 묘라고 주장하는 곳이 몇군데 있었으며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 블란카의 아들인 카를로스와의 DNA 대조를 통해서 블란카의 묘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고 합니다.
블란카가 죽은후 사실 왕위는 그녀의 아들인 카를로스에게 가야했습니다만, 블란카의 남편인 후안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고 자신이 왕위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결국 내전이 일어났고 카를로스는 아버지에게 패배해서 완전히 왕위를 후안에게 넘겨줘야했었습니다. 물론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후계자였기에 나바라의 왕위를 물려받을수 있는 지위였습니다만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그리고 블란카의 남편인 후안은 후에 형으로부터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국의 왕위까지 물려받게 됩니다. 그리고 후안이 재혼한뒤 태어난 아들인 페르난도는 후에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결혼해서 가톨릭 공동군주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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