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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바라의 인판타들...(32) 나바라의 후아나 : 카를로스 2세의 딸 (두번째)

엘아라 2020. 5. 26. 06:00

나바라의 후아나

브르타뉴 공작부인

잉글랜드의 왕비

Joan of Navarre Joanna 

(c. 1370 – 10 June 1437) 

잉글랜드 왕비로써의 문장

 

1403년 2월 후아나는 이제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헨리 4세와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런던으로 와서 잉글랜드의 왕비로 대관하게 됩니다. 아마 잉글랜드에서는 주로 "조앤"이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더 잘알려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후아나는 아름답고 상냥하며 위엄있는 여성이었다는 평가와 인색하고 욕심많았으며 뇌물을 받았다는 평가가 동시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아마 잉글랜드와 브르타뉴 사이의 관계가 애매해졌기에 그녀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는 것이기도 했을듯합니다.

 

후아나와 헨리 4세가 결혼한 직후 브르타뉴의 배가 잉글랜드 해안을 공격하게 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의회는 후아나의 브르타뉴 조신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의결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헨리 4세는 의회와의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었기에 의회의 추방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헨리 4세, 후아나의 두번째 남편

 

후아나의 개인적 삶은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연결된 사이였기에 헨리 4세와의 관계도 좋았었습니다. 헨리 4세와의 사이에서 두어번 유산만 했으며 그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헨리 4세나 후아나에게는 이미 이전 결혼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있었기에 후계자 문제는 그리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에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은 것은 큰 문제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후아나는 헨리 4세의 첫번째 아내의 아이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불화를 겪었던 아들 헨리(후에 헨리 5세)에 대해서 자주 헨리 5세의 편을 들어주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후아나와 함께 잉글랜드로 왔었던 후아나의 딸들은 모두 오빠의 명으로 다시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아마도 누이들은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할수 있었기에 아마도 누이동생들을 잉글랜드에서 돌아오도록 했을듯합니다. 

 

1413년 남편인 헨리 4세가 사망하고 의붓아들인 헨리 5세가 즉위합니다. 원래 헨리 5세는 새어머니인 후아나와 사이가 좋았었습니다만 1415년 그가 프랑스에서 잉글랜드로 돌아왔을때 사이가 틀어지게 됩니다. 왜냐면 헨리 5세는 새어머니의 아들이자 자신의 의붓형제였던 브르타뉴의 아르투르를 포로로 잡아왔기 때문입니다. 후아나는 아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혁했지만 헨리 5세는 이를 거절했고 이것은 둘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남편 브르타뉴 공작의 묘앞에서 아들인 아르투르와 함께 있는 후아나,19세기

 

그리고 이것은 훗날 후아나가 마녀로 고발당하는 원인이 됩니다. 1419년 후아나는 의회에 국왕을 살해하기 위한 마법행위를 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하게 됩니다. 이후 후아나는 자신의 재산을 뺏겼으며 성에 연금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헨리 5세는 죽기 얼마전에 새어머니에 대한 연금을 풀어줬다고 합니다.

 

석방된후 후아나는 다시 자신의 재산을 돌려받았으며 노팅험 성에서 자신의 궁정을 꾸려서 조용하지만 평온한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후아나는 죽은뒤 헨리 4세의 곁에 묻혔습니다.

 

헨리 4세와 후아나의 무덤 조상

 

후아나의 증손녀인 안 드 브르타뉴는 브르타뉴 공작령의 상속녀로 프랑스의 국왕과 결혼했었으며, 그녀를 통해서 프랑스 왕가는 브르타뉴 공작령을 손에 넣게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