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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왕비들...(41)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 샤를마뉴의 왕비

엘아라 2020. 5.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프랑스의 왕비들...(41)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 샤를마뉴의 왕비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

Hildegard 

(c. 754 – 30 April 783),


빈츠가우의 힐데가르트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는 샤를마뉴의 두번째 왕비는 크라우쉬가우의 백작이었던 게롤드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외할아버지는 알레마니의 공작이었던 나비Hnabi였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힐데가르트의 아버지인 게롤드는 넓은 영지를 상속받은 인물이었는데 그의 영지는 대부분 샤를마뉴의 동생이자 정적이었던 가를로만이 통치하던 지역에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게롤드를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는 것은 샤를마뉴에게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힐데가르트의 외할아버지는 알레마니(현재 라인강 북부지역)의 공작이었기에 알레마니 지역의 지지를 얻는데도 도움이 되는 것이었죠. 그래서 힐데가르트는 771년 샤를마뉴가 데시데리타와 헤어진 직후에 그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샤를마뉴의 바램대로 동부 라인지역과 북부지역의 세력들이 샤를마뉴를 지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힐데가르트가 결혼했을때 그녀의 나이를 교회법상 결혼할수 있는 최소 연령인 12살은 지났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10대 후반이나 20대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듯합니다. 그리고 결혼다음해부터 지속적으로 아이를 낳았고 적어도 여덟번 이상 임신을 한 기록으로 봐서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상대적으로 매우 건강했다고 추정할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많이 아이를 낳은 것으로 봐서 힐데가르트와 샤를마뉴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추정할수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샤를마뉴가 롱고바르디(롬바르드)를 점령하러 전쟁에 나섰을때 그와 함께 동행햇으며 심지어 둘째아이는 샤를마뉴가 파비아 포위공격을 하고 있을때 태어났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대부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듯합니다. 

(냉소적으로 보면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지 않아서 결국 편안한 생활이 아니라 전쟁터까지 남편을 따라가고 거기서도 아이를 낳았고 뭐 이런 상황은 아무리 건강하더라도 결국 건강을 해치게 되어서 아내가 일찍죽는 상황이 되는것이기도 하죠.)



교황에게서 황제의 관을 받는 샤를마뉴



힐데가르트는 아마도 남편과 행복했을것이며 이런 상황은 그녀가 왕비로 궁정이나 정치에 관여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그녀는 왕비로 남편이 전쟁을 하러 나설때면 남편을 대신해서 내정을 주관했었을 것이며 이것은 그녀가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것을 말했습니다. 힐데가르트는 친정식구들이 요직에 오르는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알려져있는데 샤를마뉴의 다른 아내나 첩들은 이런 행동을 하지 못 했었다고 합니다.힐데가르트는 또 교회에 많은 기부를 하고 교육기관을 세우는데 도움을 주는등의 일을 했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왕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기도 했죠.


힐데가르트는 783년 사망하는데 막내아이를 낳은뒤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한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했었던 샤를마뉴는 죽은 아내를 위해서 늘 초를 켜고 기도자가 기도하록 했다고 전해진다고 합니다.


샤를마뉴와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는 샤를마뉴와의 사이에서 많은 아이를 낳았으며 이중에서 세아들이 성인으로 살아남아서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분할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막내아들이었던 루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황제가 됩니다.


자료출처

위키 커먼스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