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미헨대공비군요.
저 책도 있는데 말입니다. -0-;;;
로마노프 가문의 여성들...(140)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 알렉산드르 2세의 며느리 (첫번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대공비
"미헨"대공비
Duchess Marie of Mecklenburg-Schwerin
Grand Duchess Maria Pavlovna of Russia,
known as "Miechen" or "Maria Pavlovna the Elder"
(14 May 1854 – 6 September 1920)
오래도록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았기에 후에 정교회식 이름인 "마리야 파블로브나"라는 이름보다 미헨이라는 애칭으로 더 잘알려진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알렉산드린 엘리자베스 엘레오노르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와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로이스 주 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테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가문은 메클렌부르크 지역을 통치하던 가문으로, 메클렌부르크 지역은 독일의 북서부지역으로 이 가문의 시조는 12세기 메클렌부르크 지역을 처음으로 통치했던 프리비슬라우Pribislaw라고 합니다. 그리고 14세기에 공작 가문이 되죠. 이 가문은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서 여러 분가들로 나뉘는데 특히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에 메클렌부르크-슈베린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는 모두 "대공"지위를 인정받아서 대공가문이 됩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문장
미헨의 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어머니가 프로이센 공주였으며 할머니는 러시아의 여대공이었습니다. 이때문에 그는 러시아의 황제들과 가까운 친척이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의 어머니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는 그의 이모였으며,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그의 할머니의 조카들이기도 했었습니다.)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군인으로 살았는데 그는 어머니가 프로이센 공주였기에 독일 통일에 이르는 상황에서 줄곧 프로이센 측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
미헨의 아버지
미헨의 어머니인 아우구스테는 로이스 가문의 분가였던 쾨스트리츠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로이스 가문의 경우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는 가문인데 이 가문은 11세기 무렵 처음 생긴 가문이었는데 특히 12세기 황제 하인리히 6세가 이 가문에 영지를 부여했었기에 이 가문 사람들은 그를 기념해서 아들들의 이름을 모두 "하인리히"라고 붙이게 됩니다. 이때문에 가문의 형제들은 모두 하인리히라서, 결국 형제들을 구별하기 위해서 하인리히 + 로마자를 붙이는 형태가 된다고 합니다. (...-0-;;; 로이스 가문 족보를 보면 형제들인데 넘버링이 나와서 이게 뭐지 싶었는데 다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군요. 어쨌든 이 가문은 족보를 보면 볼수록 머리 깨지는 가문입니다 ㅠ.ㅠ)
로이스 주 쾨스트리츠의 아우구스테
미헨의 어머니
....미헨 대공비가 엄마 닮았군요 -0-;;;
미헨의 부모는 여섯 아이를 낳았는데, 미헨의 어머니는 1862년 마흔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미헨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1864년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와 재혼하죠.안나는 대공 루드비히 2세의 손녀로 그녀의 오빠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의 사위이자 후에 백부의 뒤를 이어 헤센의 대공이 되는 루드비히 4세였습니다. 하지만 안나는 1865년 첫아이인 딸 안나를 낳고서는 산욕열로 사망했었습니다.
헤센-다름슈타트의 안나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의 두번째 부인
두번째 아내가 죽은뒤,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는 1868년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와 다시 한번 결혼합니다. 그녀는 대공보다 27살이나 어렸는데 아무래도 대공은 통치 군주였으며 마리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작은 가문 출신이기에 통치 군주의 아내가 되는 상황이어서 이렇게 결혼을 했었던듯합니다. 이때 마리의 나이는 고작 18살이었습니다.
슈바르츠부르크-루돌슈타트의 마리
프리드리히 프란츠 2세의 세번째 아내
1870년대
이렇게 미헨의 아버지는 세번의 결혼으로 열한명의 자녀를 얻었습니다. 특히 대공의 열한명의 자녀들중 딸은 셋이었고 모두 아들들이었는데 이것은 영지를 나눠받지 못하는 아들들이 자기 살길을 마련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아마 장녀였던 미헨 대공비는 이런 가족 상황을 잘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쩌면 그녀가 훗날 "야심만만한 성격"이 되는 것도 어쩌면 이런 가족환경이 어느정도 작용했을것같기도 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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