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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자리네트와 그 후손들...(26) 오르텐시아 만치니 (첫번째)
오르텐시아 만치니
마자랭 공작부인
Hortense Mancini,
Duchesse de Mazarin
(6 June 1646 – 2 July 1699),
보통은 프랑스 식으로 "오르탕스"라고 불리게 되는 오르텐시아 만치니는 1646년 로마에서 로렌조 만니치와 그의 아내인 지롤라마 마자리니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특히 위로 언니들인 라우라, 올림피아,마리와 밑으로 여동생인 마리아 안나 이렇게 그녀들 다섯 자매들은 마자랭 추기경의 조카들로 마자리네트 라고 불리던 사람들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오르탕스는 자매들중 가장 아름다웠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만치니 자매들 (올랭피아,오르탕스,마리)
당대 최고 권력자인 외삼촌덕에 오르탕스와 그녀의 자매들 그리고 그녀의 사촌들은 매우 높은 가문 사람들과 혼인을 할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매들이 시집을 잘 가면서 다른 자매들에게도 훨씬 더 좋은 기회가 돌아오게 되죠.
오르탕스의 외참촌
마자랭 추기경
오르탕스의 경우도 여러 혼담이 진행되게 됩니다. 오르탕스에게 들어온 혼담중 가장 높은 신분의 남자는 바로 망명중이었던 영국의 국왕 찰스 2세였습니다. 영국에서 일련의 내전상황이 발생하고 찰스 1세가 처형당한뒤 찰스 2세는 국외에 있으면서 왕위계승을 주장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루이 14세의 고모였기에 프랑스 궁정에서 머무르고 있었죠. 그는 아마도 아름다운 오르탕스의 외모와 프랑스의 지원을 얻을수 있으리라 기대했기에 오르탕스와 결혼하려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르탕스의 외삼촌이었던 마자랭은 영국이 군주정으로 돌아갈것에 대해서 회의적이었기에 망명중인 왕과 결혼하는 것은 그다지 메리트가 없을 것이라 여겨서 오르탕스와 찰스 2세와의 결혼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몇달후 찰스 2세는 영국의 국왕이 되죠. 기회를 놓친것을 아쉬워했던 마자랭은 엄청난 혼수를 주겠다고 하면서 찰스 2세에게 다시 혼담을 제의합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이를 거절했고 후에 더 엄청난 혼수를 가져오는 포르투갈과 결혼동맹을 맺었죠.
또 다른 혼담 상대는 사보이의 공작인 카를로 엠마누엘레 2세였습니다. 혼담이 진행되면서 오르탕스의 혼수로 중요한 요새를 요구하자 마자랭은 이 혼담 역시 거절하죠. 비슷한 이유로 로렌 공작이었던 샤를 5세와의 혼담 역시 거절했다고 합니다.
재미난 것은 이 혼담이 오갔던 두 남자와 결국 오르탕스가 관계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찰스 2세
망명중일때
결국 오르탕스는 1661년 15살의 나이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으로 알려졌었던 29살의 아르망 샤를 드 라 포르테 드 메이예레와 결혼하게 됩니다. 아르망 샤를 드 라 포르테는 프랑스의 육군 원수였던 샤를 드 라 포르테의 아들로, 샤를 드 라 포르테는 리슐리외 추기경과 사촌이었다고 합니다.
이 결혼은 몇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결혼후 태어나는 아이들이 마자랭이라는 성을 쓰는 것이 포함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마자랭은 조카들인 오르탕스가 자신의 이름을 잇길 바랬던듯합니다. 그래서 그녀의 자녀들이 마자랭이라는 성을 쓰도록 하게 했던 것일듯합니다. 그 댓가로 아르망-샤를은 다양한 영지의 엄청난 재산과 "마자랭 공작"지위를 비롯한 많은 귀족작위등을 물려받게 된다고 합니다. 물론 그는 아버지로부터 메이예레 공작 지위도 물려받게 되죠.
아르망 샤를 드 라 포르테
오르탕스의 남편
메이예레 공작, 마자랭 공작
오스탕스와 아르망-샤를과의 결혼 생활은 매우 불행했었다고 합니다. 원인은 둘의 성격차가 너무나 커서였다고 합니다. 오르탕스는 어리고 밝고 명랑한 성격이었으며 아름다웠으며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인기있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인 아르망-샤를은 질투심이 너무나 심했으며 이때문에 심지어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행동마저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영지에 있는 젖소에게서 우유를 짜지 못하게 했었다고 합니다. 또 아내가 다른 남자와 외출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매일 기도하는데 상당시간을 보내라고 강요했으며 심지어 파리를 떠나거나 나라를 떠나자고 강요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마 어리고 예쁜 부인에 대해서 의처증이 생긴듯합니다. --;;;)
오르탕스
비록 둘사이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지만 둘사이에서는 1662년부터 1666년사이에 모두 네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 하지만 결국 오르탕스는 이런 끔찍한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했고 1668년 오빠의 도움을 받아서 남편에게서 도망쳐서 로마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역시 남편과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견디지 못하던 언니 마리를 데리고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되죠.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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