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사실 이자보에 대해서 흥미가 있었고 책이랑 논문이 있다고 해서 쉽게 쓸수 있을 것이라 여겼거든요. 중세시대 여성들은 자료가 적으니 말입니다.
...흑..그런데 그게 아니었던것입니다. 그냥 친정은 단촐하다고 생각했는데 외가가 하필이면 비스콘티 가문이드랩니다. 이 비스콘티 가문은 한동안 비텔스바흐 가문과 결혼동맹을 했었고 또 프랑스 왕가와도 통혼을 했거든요. 그 정치적 상황을 보다가 완전 진이 빠지더라구요.ㅠ.ㅠ
게다가 백년 전쟁에 대해서 잘 몰랐는데 이때 부르고뉴 공작과 오를레앙 공작간의 권력투쟁과 더 나아가서는 내전까지 치닿고, 게다가 잉글랜드도 오고...-0-;;; 난리도 아니더라구요. 이자보 개인에 대한 평가보다는 그 주변 상황을 이해해야 이자보에 대한 이야기를 할수 있더라구요. 그래서 머리 깨지게 글을 읽고 있는데도 감이 잘 안옵니다.
뭐 일단 써보면 어떻게 되겠죠 =-=
[새해특집] 불운한 아내, 불운한 어머니 그리고 불운한 왕비 : 바이에른의 이자보..(1) 들어가면서
프랑스 식으로 "이자보"또는 "이자벨"이라고 불린 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은 정치적 목적으로 프랑스의 국왕과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결혼 자체가 프랑스와 잉글랜드간의 100년 전쟁의 와중에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을 서로에게 끌어들이려던 프랑스와 잉글랜드 경쟁으로 생겨난 것이었죠. 이자보의 아버지는 딸을 멀리 프랑스로 시집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결국은 딸을 보내야만했었습니다.
어린 나이로 프랑스로 시집와서 이제 이름 마저 프랑스 식으로 이자보로 불리게 된 그녀는 분명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초반 프랑스에서의 삶은 매우 행복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국왕 샤를 6세는 이자보를 보고 반해서 사랑에 빠졌고 많은 아이들이 태어납니다.
하지만 이자보의 삶에서 가장 불운한 순간이 찾아오게 됩니다. 바로 남편인 샤를 6세의 광기가 시작된것이었죠.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서 매우 폭력적으로 변했으며 처음 병이 시작되었을때 자신의 측근 기사와 심지어 동생까지 적으로 여겨서 공격했으며 기사 넷을 살해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다시 정신을 차렸지만 이런 상황을 반복되었죠. 이자보에게 매우 고통스러웠던것은 아마도 병이 발병할때마다 남편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폭력적인 성향이 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자보는 아내로 남편곁에 있으려 했으며 남편이 병이 심해지던때에도 남편과 함께 했고 아이들이 태어났었죠.
남편의 병이 심해지면서 이자보는 아마도 아이들에게 더 치중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자보는 자상한 어머니였지만 그녀의 어머니로써의 삶도 순탄하지 못했습니다. 영아사망율이 높던 시기였기에 아이들 몇몇은 태어나자마자 아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아들 셋이 성인으로 성장했지만 정작 두 아들은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차례로 사망했고 겨우 막내아들인 샤를 만이 어머니보다 더 오래살았죠. 또 딸들의 경우는 좀 나았지만 정치적 목적으로 딸들을 멀리 시집보내야했었죠. 어린 이자벨은 잉글랜드의 리처드 2세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은뒤 인질이나 마찬가지로 있었기에 노심초사하다가 겨우 무사히 되돌아오게 할수 있었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그녀는 아이를 낳다가 사망합니다. 브르타뉴 공작부인이 되는 딸만이 어머니 곁에 있었고 막내딸인 카트린느 역시 정치적 목적으로 잉글랜드 국왕과 결혼했어야했죠.
게다가 남편의 병으로 이자보는 정치의 전면에 나서야 하기 까지 했습니다. 사실 이자보의 초기 역할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크지 않았었습니다. 도리어 샤를 6세의 섭정이었으며 숙부였던 부르고뉴 공작과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간의 정치적 권력 다툼이 더 컸습니다. 이자보는 이 둘 사이에서 중재역할에 더 치중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를레앙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간의 권력다툼이 격화되면서 결국 내전이 시작되게됩니다. 오를레앙 공작이나 아버지의 뒤를 이은 부르고뉴 공작 모두가 암살당하면서 국왕 곁에 있던 섭정은 이자보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상황은 그녀가 정치적 혼란의 한복판에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궁정내 암투와 프랑스의 내전 그리고 잉글랜드의 침공이라는 어려운 시기가 겹쳤고 프랑스는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 사실상 최고 권력자로 여겨지던 이자보에게 비난이 쏟아질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자보가 프랑스 왕비이던 시절 프랑스는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물론 프랑스 내부의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아르마냑파간의 내전까지 겹쳐진 시기였습니다.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걸맞는 시기였죠. 그리고 이렇게 된 것의 가장 중요한 요인은 바로 샤를 6세의 광기와 그를 틈탄 부르고뉴공작과 오를레앙 공작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비록 프랑스에서는 루이 9세의 어머니이자 루이 8세의 아내였던 카스티야의 블랑쉬가 국정을 장악하고 아들의 섭정으로 왕국을 안정시킨 예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블랑쉬의 예는 특별한 사례였습니다. 물론 이자보도 나라를 위해서 정치적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부르고뉴파와 오를레앙파 간의 중재를 위해서 노력했었죠. 하지만 중재자라는 위치는 매우 애매한 것으로 반대되는 양측을 잘 화해시킨다면 둘의 칭송을 받을수 있지만 실패한다면 도리어 양쪽의 비난을 면치 못하는 지위였죠. 그리고 이자보는 불행히도 양쪽을 중재하는데 성공하지 못했었습니다.
결국 그녀의 불운한 삶은 그녀가 당대 어떤 행동을 하던 비난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이것은 이후 잉글랜드와의 트루아 조약을 거치면서 이자보에 대해서 "아들의 계승권을 박탈하고 나라를 팔아넘겼다"라는 이미지를 굳히게 됩니다. 게다가 잔 다르크가 나타나 백년 전쟁의 판도를 뒤바꾸게 되면서 "구국의 영웅"인 잔다르크와 반대되는 이미지로 이자보가 더 굳어진것일 것입니다.
많은 정치가들이 실패를 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자보의 아들이자 잔다르크의 도움으로 결국 프랑스의 국왕이 된 샤를 7세가 있습니다. 사실 잉글랜드의 침공이 시작되고 특히 아쟁쿠르 전투 이후 프랑스의 위기가 닥치자 부르고뉴 파와 아르마냑파 사이의 휴전과 공동 대응을 위한 협상을 진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협상을 위해 비무장한채 온 부르고뉴 공작을 샤를 7세의 측근이 암살해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은 부르고뉴 공작파가 잉글랜드를 지지하면서 프랑스의 대부분을 잉글랜드가 장악할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것입니다. 이런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 샤를은 몰랐다고 주장하지만 그의 측근의 행동에 대해서 그가 몰랐다는 것이 의심스러우며, 또 만약 진짜 몰랐다면 이렇게 중요한 상황에 대해서 측근을 통제하지도 못한 샤를 7세를 비난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고뉴 공작측에 파리가 점령당하고 부모가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에 이르게 만들었으며 결국 이자보가 트루아 조약을 승인하게 된 계기를 만든것은 사실 샤를 7세의 실책일 것입니다.
결국 이자보는 불운한 시대 불운한 상황에서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두파 모두가 그녀에게 비난을 가하는 상황에 직면했었습니다. 결국 당대 기록들은 부르고뉴 공작이나 아르마냑 파의 기록이었으며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되지 않은 시기에 대해 이자보에 대한 비난을 기록했고 결국 그녀의 삶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이들의 비난으로 채워지게 된것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서 이런 비난은 점차 더 견고해졌고 특히 국가라는 개념이 확고히 확립되는 시기가 되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X라는 이자보의 이미지는 더욱더 굳어지게 된 것일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공적으로건 사적으로건 불운한 삶을 살았던 이자보의 삶을 따라가면서 그녀의 불운한 삶이 결국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만나서 어떻게 수백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녀에게 악명을 가져다 주게 된것인지 살펴볼까합니다.
크리스틴 드 피장에게서 책을 헌정받은 이자보 왕비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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