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포르투갈

포르투갈의 인판타들...(1) 들어가면서

엘아라 2017. 3. 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포르투갈 항목이 생긴걸 보시고 대충 시리즈를 짐작하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네 이베리아 반도를 다 해볼 생각이 있습니다.

그런데 카스티야나 아라곤으로 갈려니 중세라..-0-;;;

차라리 포르투갈부터 할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포르투갈 하나도 모르고 이제 시작하면서 글쓰는겁니다.

역시나 제 글은 용두사미가 될수도..흑


포르투갈의 인판타들...(1) 들어가면서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된 시기는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8세기 이베리아 반도는 이슬람 세력의 침입을 받았으며 곧이어 "레콘기스타"라고 불리는 기독교의 영지 회복 운동이 시작되죠. 이후 이베리아 반도 내의 상황은 복잡하게 흘러가는데 기본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에 뺏긴 영토를 회복하는 과정이었습니다만, 이런 기독교 국가들 내부의 문제로 나라들이 쪼갈라지거나 통합되는 일등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게 됩니다. 



13세기경 이베리아 반도


11세기 후반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이었던 알폰소 6세는 사위였던 부르고뉴 백작의 아들인 부르고뉴의 레이몽에게 포르투갈 백작령을 부여해줍니다. 하지만 레이몽의 세력이 커지게 되자 알폰소 6세는 자신의 또다른 사위였던 부르고뉴 공작의 아들(부르고뉴 공작가문은 프랑스의 카페 왕가의 분가로 부르고뉴 백작가문과는 다른 가문입니다.)인 부르고뉴의 앙리에게 포르투갈 백작령을 줍니다. 앙리의 아들인 아폰수는 포르투갈 백작령을 키워서 독립적 세력으로 만들게 됩니다. 1139년 아폰수는 스스로 "포르투갈의 국왕"이라고 칭했으며 1143년 포르투갈 백작령의 상위군주였던 카스티야와 레온의 알폰소 7세는 포르투갈의 독립을 인정하고 사촌인 아폰수를 국왕으로 승인합니다. 그리고 1179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아폰수를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승인합니다. 이로써 포르투갈 왕국이 성립되었습니다.



아폰수 1세


아폰수 1세로 부터시작된 부르고뉴 왕가는 14세기까지 유지 됩니다. 14세기 부르고뉴 가문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페르난두 1세는 남성 후계자 없이 사망합니다. 그렇게 되자 페르난두의 이복동생이자 서자 출신이었던 아비스 기사단장 주앙과 페르난두의 딸인 베아트리스가 왕위계승을 두고 다투게 됩니다. 베아트리스는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와 결혼했기에 후안 1세는 아내의 권리를 들어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했었죠. 결국 이 싸움은 주앙의 승리로 끝났으며 주앙은 포르투갈의 국왕 주앙 1세가 되고 포르투갈은 "아비스 가문"이 통치하게 되죠.



주앙 1세


주앙 1세로부터 시작된 아비스 가문은 16세기까지 지속되지만, 16세기에 남성후계자가 단절되게 됩니다. 마지막 국왕이었던 안토니오의 사후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의 왕위계승을 주장합니다. 펠리페 2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공주였으며 에스파냐 왕가는 오래도록 포르투갈 왕가와 혼인 관계에 있었기에 남성 직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충분히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할수 있었습니다. 이에 포르투갈쪽에서는 포르투갈이 독립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에스파냐의 국왕을 포르투갈의 국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

포르투갈의 필리페 1세


하지만 17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은 에스파냐의 영향력을 벗어나려했습니다. 그리고 브라간사 공작이 아비스 가문의 후손임을 내세워서 포르투갈의 왕위를 얻게 되죠. 브라간사 공작은 아비스 가문의 첫번째 국왕이었던 주앙 1세와 그의 정부였던 이네스 페레스의 아들이었던 아폰수가 브라간사 공작 지위를 받으면서 생긴 가문이었습니다. 이때문에 브라간사 가문은 아비스 가문의 남성 후계자로써 포르투갈 왕위를 주장할 명분이 있었으며 또 브라간사 공작으로 포르투갈의 첫 국왕이 된 주앙 4세는 할머니를 통해서 포르투갈의 국왕 마누엘 1세의 현손이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브라간사 가문은 포르투갈 왕위를 얻게 되죠.



브라간사 공작 주앙

후에 포르투갈의 주앙 4세


19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의 정치 상황은 복잡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인해서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로 피난갔었으며 포르투갈에서는 자유주의가 활발해졌었죠.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뒤 포르투갈 왕가는 복귀했지만 정치적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주앙 6세의 아들이었던 페드루는 스스로 브라질 황제로 즉위했었으며 후에 포르투갈의 왕위도 이어받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로 포르투갈 왕위는 딸인 마리아에게 브라질 황제위는 아들인 페드루에게 물려줬습니다. 포르투갈 내 정치 상황이 혼란했기에 마리아의 즉위를 반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대표적 인물이 페드루의 동생이었던 미겔이었죠. 이에 페드루는 미겔과 자신의 딸인 마리아를 결혼시키기로 합니다만, 미겔은 이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나 미겔은 쫓겨나게 되고 마리아가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의 페르디난트와 결혼했고 마리아와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이 왕위를 잇게 됩니다.



포르투갈의 미겔 1세와 그의 조카인 마리아 2세



하지만 20세기가 되면서 포르투갈은 공화정이 되었으며 포르투갈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마누엘 2세는 포르투갈 왕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마누엘 2세는 후손없이 사망했으며 마리아와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 계열의 남성 직계 계승자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마누엘 2세는 죽기전 미겔 1세의 손자였던 두와르테 누노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했습니다. 이후 가문의 수장은 다시 브라간사 공작 가문의 후손입니다.



포르투갈의 마누엘 2세


현재 포르투갈은 공화국이며, 브라간사 공작 가문의 수장은 단순히 "왕위계승요자"일뿐입니다. 하지만 현 브라간사 공작은 포르투갈에서 거주하며 활발한 정치활동을 하고 있습니다.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 포르투갈 외교부에서는 그에대해 정식으로 "브라간사 공작"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포르투갈이 여전히 공화국이라는 것을 강조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두아르테 피오, 브라간사 공작

현 포르투갈 왕위계승 요구자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