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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99)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 : 나폴레옹 3세의 정부(두번째)

엘아라 2016. 6. 27.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ㅠ.ㅠ 몇시간째 글을 읽고 있으니 완전 지칩니다.

이래서 이탈리아는 힘들다니까요..ㅠ.ㅠ


정부들과 그 후손들...(99)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 : 나폴레옹 3세의 정부(두번째) 




비르지니아 올도이니

카스틸리오네 백작부인

Virginia Oldoini, 

Virginia Elisabetta Luisa Carlotta Antonietta Teresa Maria Oldoïni

Countess of Castiglione 

(22 March 1837 – 28 November 1899)


비르지나는 길고 풍성한 웨이브의 금발머리에, 흰 피부와 우아한 계란형의 얼굴이었기에 모두에게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아름다운 비르지나는 곧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되었고 이탈리아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으리라 여겨졌습니다.


비르지나의 남편인 카스틸리오네 백작은 아내가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된 것을 알고나서는 아내와 공식 별거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상황은 결혼이 끝난것이나 다름 없었는데, 가톨릭에서 결혼을 끝내는 방법은 교회에서 "공식적 무효"를 선언하는 것밖에 없었기에 이런 별거는 실제적 이혼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비르지나의 남편인 카스틸리오네 백작은 후에 통일된 이탈리아에서 고위 귀족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카스틸리오네 백작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의 아들이자 에스파냐의 국왕으로 선출되었던 아메데오와 그의 첫번째 아내인 마리아 비토리아 달 포초 델라 크리스티나의 결혼식때 낙마했고, 이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파르마의 공작 카를로 3세

...라고 알고 있었는데 카스틸리오네 백작의 초상화를 찾으니 이 초상화가 나오네요.

출처라고 주장한 곳은 이탈리아 박물관사이트 같은곳이었는데..

문제는 저 초상화가 카를로 3세랑 정말 많이 닮았드랩니다.-0-;; 

사실 복장이 좀 통치 군주 복장이라기에는 너무 간략하다는 생각이 살짝 들긴하네요.-0-;;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된 비르지나는 파리 사교계에 엄청난 화제를 몰고 다니게 됩니다. 매우 아름다웠을뿐만 아니라 파격적 의상을 선보이기도 했었던 비르지나에 대해서 사진작가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진사들은 비르지나의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비르지나 역시 자신의 화려했던 순간을 담은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죠. 이후 비르지나는 오래도록 수많은 작품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비르지니아


나폴레옹 3세의 정부가 된 뒤, 비르지나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어느정도 친분을 쌓게 됩니다. 여기에는 독일의 빌헬름 1세의 황후가 되는 아우구스타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등도 포함되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와의 관계는 1857년 끝나게 됩니다. 궁정에서 정부로 화려하게 군림했던 비르지나는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으며 황제로부터 엄청난 돈을 받았었죠. 이런 상황은 언제나 처럼 정적을 만들게 됩니다. 결국 황제에게 새 애인이 생기게 되면서 황제와 사이가 벌어졌고, 게다가 그녀의 집에서 나오던 나폴레옹 3세에 대해서 암살 시도가 있었기에 훨씬더 곤란한 처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비르지나는 나폴레옹 3세와 헤어졌으며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미 공식 별거를 요구했었기에 남편과 다시 사는 것은 좀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던 1861년 비르지니아는 다시 프랑스로 갑니다. 재미난 것은 이때쯤 비르지니아가 나폴레옹 3세의 아이를 낳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비르지니아가 1862년 비밀리에 나폴레옹 3세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가 아르투르 위겐슈미트라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아르투르 위겐슈미트는 궁정의 고용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린시절부터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인 프린스 임페리얼의 놀이친구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외제니 황후와 가까웠는데, 아들이 죽고 나서 외제니 황후가 그를 불러서 아들을 그리워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또한 그는 비르지니아와도 가깝게 지냈는데 이때문에 비르지니아와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후에 그와 주변 사람들이 비르지니아가  죽기전 그가 비르지니아와 나폴레옹 3세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고 이야기했다고 주장합니다.



아르투르 위겐슈미트


남은 평생을 프랑스에서 산 비르지니아는 나이가 들수록 괴팍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녀는 나이가 들면서 전설적인 자신의 미모가 사그라드는것을 싫어했고 그것을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때문에 집에 장례식때쓰는 애도용 검은 천으로 온 집안을 드리웠으며 거울들을 다 가리고 절대 보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낮에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것을 두려워해서 밤에만 밖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1890년대 비르지니아


1890년대 비르지니아는 사진작가와 다시한번 사진작업을 하려했고, 1900년에 사진 전시회를 하려 계획했었다고 합니다만 이 일은 성사되지 못합니다. 1899년 비르지니아는 사망했고 파리에 묻혔습니다.



1860년대 비르지니아


자료출처

1.위키 피디어(프랑스어, 이탈리아어 + 구글 영문 번역 포함)

2.https://www.geni.com/people/Francesco-Verasis-conte-di-Castiglione/6000000012645776373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