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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파냐의 인판타들...(22)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 카를로스 4세의 딸(두번째)

엘아라 2016. 3.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ㅎㅎㅎ 모르시는분도 계시겠지만 제가 글을 미리 써놓거든요. 그러니까 3월 글은 보통 2월에 다 써놓습니다.

그래야 저도 시간이 나거든요.


그런데 요즘 제가 좀 바쁘거든요. -0-;;;;(그러니까 글쓴 시점에서도 바쁜데 사실 3월에는 더 바쁘고 4월초에는 더 바쁘다죠.)

지금은 그래도 시간을 내서 쓸수 있는데 4월달 글은 과연 쓸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ㅠ.ㅠ

안되면 바짝 4월글까지 쓸까 고민중이기도 합니다만...ㅠ.ㅠ

제가 능력이 많이 딸려서 말입니다...엉엉엉..


에스파냐의 인판타들...(22)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 카를로스 4세의 딸(두번째)




인판타 마리아 루이사

에트루리아 왕비

루카 여공작

Maria Luisa of Spain

(María Luisa Josefina Antonieta Vicenta)

(6 July 1782 – 13 March 1824)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

이거 고야 그림이던가?



마리아 루이사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의 매우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으며, 프랑스 혁명전쟁을 거쳐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에서 지속되던 시기였었죠. 에스파냐의 왕족이자 프랑스 왕가의 방계왕가였으며, 시어머니가 오스트리아 여대공이었던 마리아 루이사 역시 이런 상황을 피해 갈수 없었습니다. 



아들과 함께 있는 루도비코와 마리아 루이사


1800년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게 된 나폴레옹은 이제 서서히 유럽에 대한 여러가지 재편을 시작합니다. 그중 하나가 에스파냐와의 평화조약이었죠. 에스파냐는 프랑스 혁명 전쟁이 일어난 뒤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프랑스에 대해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런 에스파냐에 평화를 제의합니다. 에스파냐보다 영국을 더 적대시했던 나폴레옹은 유럽 대륙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몰아내려했으며, 이에 에스파냐와의 평화조약을 제의하죠. 1800년 여름 나폴레옹의 동생인 뤼시엥 보나파르트는 협상을 위해 에스파냐로 오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파냐와 프랑스는 평화조약을 맺게 되죠. 여기서 마리아 루이사의 남편이자 역시 에스파냐 왕가의 분가 출신이기도 한 루도비코의 지위가 결정됩니다. 그는 프랑스의 영향력아래 있던 자신의 파르마 공작령을 포기하는 대신 중부 이탈리아 지방을 통치하는 국왕이 되게 된 것이었죠. 프랑스에 의해서 만들어진 "에트루리아 왕국"의 국왕이 된 것이었습니다.



1803년경 이탈리아 지도


이 상황에 대해서 마리아 루이사의 친정 식구나 시댁 식구들은 대부분 찬성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마리아 루이사가 남편과 함께 자신의 식구들을 떠나 전혀 모르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것이었기에, 그녀는 이 계획에 대해 거부감을 표현합니다만 어쩔수 없었죠. 게다가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과 함께 프랑스의 파리로 가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시이모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어머니의 사촌이었던 루이 16세가 처형된지 10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파리로 간다는 것은 마리아 루이사에게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 문제는 결국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남편인 루도비코가 파리로 가게 만듭니다.



카를로스 4세와 마리아 루이사 왕비 그리고 그 가족들



파리에서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남편 루도비코는 그리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나폴레옹 궁정의 기록을 남겼던 로라 쥐노는 마리아 루이사에 대해서 수줍음때문에 그녀의 성품을 제대로 못 느끼게 했다라고 언급했었죠. 사실 마리아 루이사 역시 파리에서 그다지 좋은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내내 아프고 열이 났었는데, 그녀는 자신보다 더 건강이 안 좋은 남편의 상태 때문에 걱정스러워하고 있었죠. 말메종에서 에트루리아 국왕 부부를 만났던 한 프랑스인은 마리아 루이사에 대해서 "...지위에 걸맞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아내로써 어머니로써는 매우 훌륭한 행동을 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파리에서 삼주를 머문뒤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시댁인 파르마로 갑니다. 그곳에서 시댁 식구들을 만난뒤 남편의 통치 영지인 에트루리아 왕국으로 가게 됩니다. 에트루리아의 수도였던 피렌체에서 머물렀던 루도비코와 마리아 루이사는 불운하게 새 영지에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루도비코의 건강은 더 나빠졌으며 마리아 루이사 역시 아이를 유산했었죠. 게다가 수입도 매우 부족했었다고 합니다.



루도비코


에트루리아 왕국의 왕비로 마리아 루이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했습니다만, 많은 이들이 인기있었던 토스카나 대공을 잊지 못했었고 이런 상황은 새로 온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에게 호의적이지 않게 만들었죠. 게다가 에트루리아 왕국의 재정 상황마저도 매우 나빴었고 프랑스 군이 주둔해있었기에 새로운 군주에 대한 평판은 더욱더 떨어지게 됩니다.


1802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남편은 동생들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에스파냐로 갑니다. 사실 마리아 루이사는 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열악했던 재정 상황은 물론이고, 루도비코의 건강은 더 나빠졌으며 마리아 루이사 역시 임신중이었기에 여행중 아이가 잘못될까봐 두려웠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프랑스의 압력때문에 그녀는 남편과 함께 에스파냐로 가야 했었습니다.



마리아 루이사의 여동생

마리아 이사벨라

양시칠리의 왕비


가기직전 남편인 루도비코의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기에 잠시 그의 회복을 기다려야할 정도였었습니다. 그리고 에스파냐에 도착하기 전에 배에서 마리아 루이사는 아이를 낳게 되죠. 난산이었기에 의사는 처음에는 마리아 루이사와 아이를 살릴수 없을것이라 여겼을 정도였다고 합니다만 어쨌든 마리아 루이사와 딸인 루이사 카를로타는 살아남았었죠. 이런 상황때문에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는 결혼식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으며 마리아 루이사의 상태 역시 나빴다고 합니다. 게다가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가 에스파냐에 도착한 일주일 뒤에 루도비코의 아버지였던 파르마 공작이 사망했었죠. 마리아 루이사와 루도비코는 아프고 상중이었기에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었습니다만 카를로스 4세 부부는 딸 부부를 마드리드로 데려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말에 겨우 다시 에트루리아로 돌아갈수 있었죠.


에트루리아에 돌아온뒤 루도비코의 건강은 더욱더 악화되었으며, 마리아 루이사는 남편 대신 공무를 처리해야했습니다. 남편없이 공식 석상에 혼자 나오는 모습이 자주 비춰졌는데 결국 이런 상황은 마리아 루이사가 자신의 어머니처럼 남편 대신 정무를 뒤흔든다는 비난을 받게 만들었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많이 아팠으며 결국 1803년 5월 30살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두 아이와 함께 있는 에트루리아 국왕 부부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