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겨울에도 식중독은..ㅠ.ㅠ
에스파냐의 인판타들...(19)인판타 카를로타 호아키나 : 카를로스 4세의 딸(두번째)
에스파냐의 카를로타 호아키나
포르투갈의 왕비
Carlota Joaquina of Spain
(Carlota Joaquina Teresa Cayetana)
( 25 April 1775 – 7 January 1830)
카를로타 호아키나와 주앙은 불행한 부부였습니다. 둘 사이는 서로 맞지 않았는데 둘의 성격은 물론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죠. 이를테면 주앙이 25살 무렵이었던 1792년쯤 그는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시녀였던 여성과 연애질을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스캔들을 피해 내보내졌지만 주앙은 평생 그녀를 후원했다고 합니다. 이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첫아이를 낳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남편에게 배신감을 느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게다가 둘은 성격도 차이가 났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남편이 성직자들에게 강하게 영향을 받는것을 못마땅해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남편보다 좀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때문에 남편의 정책에 대해서 비판적 입장을 취했었던듯합니다. 게다가 주앙은 우울증 증세를 가지고 있었기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런 남편을 답답해하기도 했었죠
주앙과 카를로타 호아키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홉아이를 낳습니다. 하지만 아홉째아이를 낳은 후에 둘은 별거하기로 결정하죠. 이런 상황은 카를로타 호아키나에게도 그다지 좋게는 작용하지 않았는데 궁정에서는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답답한 남편 대신 다른 남자를 찾았으며, 심지어 밑의 아이들은 남편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까지 퍼졌었다고 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
이런 생활이 갑자기 바뀐것은 나폴레옹 전쟁때문이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했으며 에스파냐를 수중에 넣었죠. 그리고 포르투갈 역시 손에 넣으려합니다. 영국과 포르투갈은 이에 맞서지만 결국 리스본은 나폴레옹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되죠. 이렇게 되자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남편이자 섭정이었던 주앙은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 모두와 수많은 귀족들과 함께 서둘러 포르투갈을 떠나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로 갑니다. 이때 리스본 사람들은 왕가가 자신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 경악했었다고 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서둘러 포르투갈을 떠나 브라질로 가게 됩니다.
브라질에 도착한 포르투갈 왕가 사람들
1816년 시어머니인 마리아 1세가 죽은뒤 남편인 주앙이 주앙 6세로 즉위하면서 카를로타 호아키나 역시 왕비가 됩니다.
주앙 6세
1822년 포르투갈 왕가는 브라질에서 다시 포르투갈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포르투갈 내에서 왕가에 대한 신임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왕가가 본토를 버리고 브라질로 가므로써 포르투갈 사람들은 왕가에 배신감을 느꼈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 전쟁이후 자유주의에 대한 열망이 커졌기 때문이었죠. 이런 상황은 포르투갈 내에서 "입헌군주제"를 시행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남편은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이를 지지했었습니다. 이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쿠데타를 일으켜 남편을 퇴위시키고 막내아들이자 자신과 같은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미구엘을 즉위시키려하죠. 이 시도는 영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미구엘은 국외로 추방당했으며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리스본 중심에서 약간 떨어진 왕궁인 켈루스 왕궁으로 옮겨가서 조용히 살았다고 합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조용히 살았지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특이한 행동과 옷을 입어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고 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막내아들
미구엘
1825년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브라질의 황후"라는 명예 칭호를 얻게 됩니다. 1822년 왕가가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돌아갈때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장남인 페드루는 브라질에 남아서 섭정으로 브라질을 통치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브라질 제국"이라는 독립국을 선언했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죠. 이에 주앙 6세는 아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1825년 정식으로 페드루는 브라질 황제로 인정받았으며,주앙과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명예 칭호로 "브라질 황제와 황후"지위를 얻었던 것입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장남
페드루
1826년 주앙 6세는 죽어가고 있었지만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죽어가는 남편을 보는것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녀와 주앙 6세 사이는 이미 돌이킬수 없을만큼 멀어졌으며 이때문에 남편이 죽어가는것을 보려하지 않았던듯합니다. 주앙 6세가 죽었을때 그가 독살당했으며 카를로타 호아키나가 범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90년대 연구팀은 주앙 6세의 심장조각에서 두사람을 죽일만한 양의 비소를 검출했다고 밝히므로써 그가 독살당했다는 이야기에 신빙성을 부여했다고 합니다.
주앙 6세
남편이 죽은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정치적으로 그다지 힘이 없었습니다.정치무대에서 그녀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데,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장남인 페드루는 아버지가 죽은뒤 포르투갈 왕위도 물려받게 되지만 포르투갈의 국왕 지위는 딸인 마리아에게 양위합니다. 그리고 내전의 우려를 막기 위해 마리아와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막내아들인 미구엘을 결혼시켜서 나라를 안정시키려했죠. 마리아가 브라질에서 포르투갈로 올동안 포르투갈의 섭정으로 페드루의 여동생인 이사벨 마리아가 섭정이 되었습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선왕비였음에도 섭정이 되지 못했었죠.
인판타 이사벨 마리아
카를로타 호아키나의 아들인 미구엘은 조카와의 결혼으로 국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스스로 국왕이 됩니다. 이상황은 포르투갈 내의 내전상황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 와중에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사망하게 되죠. 그녀의 죽음 역시 여러가지 이야기가 있는데 병으로 인해서 사망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정치적 문제에 좌절감을 느껴서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카를로타 호아키나
카를로타 호아키나는 주앙 6세와의 사이에서 아홉아이들을 낳습니다. 그리고 여덞명의 아이가 성인으로 성장했습니다. 살아남은 아이들중 장남인 페드루는 브라질의 황제가 되었죠.(그리고 마누라 때리던 나쁜넘--;;;) 막내아들인 미구엘은 포르투갈의 왕위를 주장하면서 오래도록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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