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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들과 그 후손들...(52) 몽테스팡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아테나이 : 루이 14세의 정부(첫번째)

엘아라 2015. 6. 1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몽테스팡 후작부인 할 차례입니다.

뭐랄까 몽테스팡 후작부인은 살아서는 루이 14세 마음을 사로잡았고 나중에 버림받긴했지만 자녀들은 결국 프랑스 왕가와 연결되어서 후손들이 나름 잘먹고 잘살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솔직히 현 오를레앙 가문 수장은 몽테스팡 후작부인 후손이니까요.-0-;;; 


정부들과 그 후손들...(52) 몽테스팡 후작부인 프랑수아즈 아테나이 : 루이 14세의 정부(첫번째)



프랑수아즈-아테나이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마트

몽테스팡 후작부인

"마담 드 몽테스팡"

Françoise Athénaïs de Rochechouart de Mortemart, 

marquise of Montespan 

Madame de Montespan

(5 October 1640 – 27 May 1707)

1660년경 


일반적으로 "마담 드 몽테스팡"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프랑수아즈 드 로슈슈아르 드 모트마르는 1640년 모르마트 공작 가브리엘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마트와 그의 부인인 디안 드 그랑세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프랑수아즈의 아버지인 모르마트 공작 가브리엘은 루이 13세와 어린시절부터 친구였으며 루이 13세가 신뢰한 신하중 한명이었습니다. 또 가브리엘은 루이 13세 시절의 권력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과도 원만하게 지냈으며,후에는 루이 14세의 섭정모후가 되는 안 왕비와도 잘 지냈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즈의 어머니였던 디안 드 그랑세뉴는 그랑세뉴 후작의 딸로 고위 귀족의 딸로써 궁정에서 왕비의 시녀가 되었죠. 이런 상황은 그녀가 국왕의 친구였던 모르마트 공작과 결혼할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의 아버지

가브리엘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마트

모르마트 공작


프랑수아즈의 부모는 매우 성격이 차이가 났는데 아마도 프랑수아즈는 경건하고 자비심 많았다는 어머니 디안보다는 여성편력이 심했다고 알려진 아버지를 더 많이 닮았던듯합니다. 모르마트 공작부부의 성정에 대해서는 한 일화가 전해져오는데 공작부인이 밤늦게 돌아온 남편에게 "악마와 즐기고 있는거냐"라고 따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작은 "당신의 수호천사와 있는것보다는 내 악마와 있는편이 더 즐겁소"라고 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모르마트 공작부인은 아이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매우 신앙심이 깊었고 늘 바람을 피워대는 남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남편이 회개하길 바라면서 기도했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즈의 형제자매들중 오빠인 루이 빅토르를 제외하고는 모두 자매들이었죠. 루이 빅토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르마트 공작이 되었으며 성공한 군인이기도 했었습니다. 언니인 가브리엘은 프랑수아즈처럼 아름답고 위트있는 여성으로 알려져있었으며 Thianges 후작과 결혼했었습니다.그리고 여동생인 마리 마델라인 가브리엘 아델라이드는 역시 다른 자매들처럼 아름다웠다고 알려져있었지만 좀더 어머니를 닮아서 철학등을 열성적으로 공부했으며 결국 수녀원으로 들어가서 퐁테브로 수녀원의 원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의 여동생

마리 마델라인 가브리엘 아델라이드

퐁테브로 수녀원 원장



프랑수아즈와 그녀의 자매들은 어린시절부터 아름답고 위트있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즈는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궁정이 있는 루브르와 가문의 영지를 자주 왕래하면서 살았었고 좀 자라서는 당시 많은 귀족여성들처럼 수녀원으로 들어가 공부를 했었죠. 쾌활한 성격의 프랑수아즈였지만 어린시절에는 경건한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신앙심이 매우 깊었으며 영성체를 매우 참석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프랑수아즈가 궁정으로 가게 된것은 1660년 20살때로 루이 14세의 사촌이자 제수였던 마담(앙리에트 안)의 시녀가 되면서였습니다. 그녀를 시녀로 선택한것은 모후였던 안 왕비였는데 아마도 프랑수아즈의 어머니인 디안이 안 왕비의 시녀였던것과 연결이 되어서 프랑수아즈가 궁정에서 일할수 있었던듯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루이 14세가 에스파냐의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하면서 프랑수아즈가 왕비의 시녀가 될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시녀보다는 왕비의 시녀가 지위가 더 높았을테니 말입니다.)



"마담"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앤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 안 



아름답고 위트있으며 신분이 높은 프랑수아즈는 아마도 궁정에서 인기 있는 여성이었을듯합니다. 이런 인기는 여러 남자가 프랑수아즈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었죠. 그리고 프랑수아즈는 자신보다 한살 어린 몽테스팡 후작 루이 앙리 드 파달량 드 공링(Louis Henri de Pardaillan de Gondrin)과 결혼합니다. 둘의 결혼에 대해서 사실 프랑수아즈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는데 그가 결투 때문에 도망갔고 이때문에 결국 프랑수아즈가 몽테스팡 후작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둘은 1663년 1월에 결혼했는데 그해 11월에 딸인 마리 크리스틴이 태어났고 그 다음해인 1664년 9월에는 아들인 루이 앙투안이 태어났죠.



프랑수아즈의 남편

몽테스팡 후작


사실 사랑에 빠져 결혼했지만, 몽테스팡 후작은 그다지 부유하지 못했고 아내를 부양하기 위한 돈도 부족했었던듯보입니다. 결국 몽테스팡 후작부부는 루브르 궁전 근처 작은집에서 살았으며 프랑수아즈는 "마담"(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시녀로 계속 일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은 마담 드 몽테스팡의 아름다움이 궁정에 널리 알려지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마담 드 몽테스팡은 매우 지적이었으며 위트를 가진 여성이었고 이런 마담 드 몽테스팡에게 매료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마담 드 몽테스팡과 교류를 했으며 이런 상황은 사교계에 마담 드 몽테스팡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일이었고 곧 국왕인 루이 14세가 그녀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듯합니다.



마담 드 몽테스팡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