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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88)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녀
오스트리아-에스테의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of Austria-Este
(Maria Theresia Josefa Johanna)
(1 November 1773 – 29 March 1832)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파 요한나 여대공은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페르디난트와 그의 아내이자 모데나 공작령의 상속녀였던 마리아 베아트리체 데 에스테의 딸로 밀라노에서 태어났습니다. 장녀였던 그녀는 다른 많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녀들처럼 할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딴것입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은 큰딸의 이름을 몽땅 어머니 이름을 따더군요. 아들들은 물론 딸들도 그래서 결국 가톨릭 왕가들 상당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이름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밀라노 총독으로 있었으며 이때문에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밀라노에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는 장인이 죽은뒤에 모데나 공작령을 상속받을 예정이었지만 그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장인이 죽기 전에 모데나는 나폴레옹의 침공으로 프랑스에 점령당했고 페르디난트는 죽을때까지 모데나의공작이 될수 없었죠.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동생이 나폴레옹 전쟁이후 모데나의 공작이 됩니다.
부모와 여동생과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런 아버지의 불행을 함께 겪지는 않았습니다. 그녀는 열다섯살이었던 1789년 사르데냐의 국왕의 둘째아들인 아오스타 공작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와 결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결혼전 사르데냐측에서는 신부후보로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해서 면밀하게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런 많은 조건을 충족하는 신부후보였기에 결혼이 결정됩니다.
1789년 4월 25일 15살의 마리아 테레지아는 29살의 아오스타 공작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와 결혼합니다.
아오스타 공작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이제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테레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그녀는 남편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둘사이에는 모두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났는데 유일한 아들이었던 카를로 엠마누엘레는 2살때 천연두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테레사는 동서였던 프랑스의 클로틸드(루이 16세의 동생)과 매우 좋은 사이였으며 올케였던 마리아 안나와도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이 셋은 서로 친했기에 아마도 사르데냐 왕가는 매우 화목한 분위기가 느껴졌을듯합니다.
1798년 나폴레옹이 이탈리아를 침공하자 마리아 테레사는 다른 가족들과 함께 처음에는 토스카나로 피신했다가 나중에는 사르데냐섬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1802년 시아주버니인 카를로 엠마누엘레 4세가 퇴위하고 그녀의 남편이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1세가 되자 마리아 테레사 역시 이제 사르데냐의 왕비가 됩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여전히 이탈리아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마리아 테레사는 전쟁이 끝난뒤인 1814년이 되어서야 수도인 토리노로 돌아갈수 있었습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녀의 남편인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1세
그리고 둘의 세딸들
토리노에 처음 입성했을때 마리아 테레사는 매우 환영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환영은 오래가지 않았는데 프랑스 점령당시 프랑스인들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해서 왕비가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의견을 피력했으며 또 옛방식으로 회귀하는 여러가지 정책들에 왕비가 개입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녀에 대한 평판은 악화되게 됩니다. 결국 이런 사항은 1821년 봉기를 유발하게 됩니다.사실 이미 프랑스식 자유주의를 맛본 사람들이 다시 옛방식을 고집하는 왕가와 정부에 반발하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녀의 남편은 이 사건으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퇴위해야했습니다. 마리아 테레사는 퇴위한 남편을 따라 몬칼리에리 성에 거주했었다고 합니다.그녀의 남편은 1824년 사망합니다만 바로 토리노로 돌아가지는 못합니다.
마리아 테레사는 사르데냐 왕위계승문제에 관여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큰사위이자 조카인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가 사르데냐 왕위를 이어받길 원했지만 그녀의 시동생이자 국왕이었던 카를로 펠리체는 사보이아 가문의 다른 분가인 사보이아-카리나노 가문 출신의 카를로 알베르토를 확고하게 왕위계승자로 고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결국 마리아 테레사는 토리노로 돌아오는 것을 금지당하는데, 1831년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가 될 헝가리 국왕인 페르디난트와 마리아 테레사의 딸 안나가 결혼하면서 마리아 테레사는 다시 토리노로 돌아올수 있도록 허락받게 됩니다. 그리고 돌아온 다음해에 그녀는 사망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테레사와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1세 사이에서는 모두 일곱명의 아이가 태어납니다만, 성인으로 성장해서 결혼한 자녀는 모두 넷이었고 모두 딸이었습니다. 큰딸인 마리아 베아트리체는 사촌인 모데나 공작 프란체스코 4세와 결혼했으며, 둘째인 마리아 테레사는 파르마의 공작인 카를로 2세와 결혼합니다. 셋째인 마리아 안나는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페르디난트 4세와 결혼했고 막내인 마리아 크리스타나는 양시칠리의 국왕 페르디난도 2세와 결혼합니다.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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