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 양위 특집을 하고 싶은데 이게 완전 쇼크 상황인듯합니다.
양위면 그다음 왕이 즉위해야하잖아요. 그런데 후안 카를로스는 쿨하게 편지만 쓰고 늬들 알아서 해라..라는 분위기고 언론은 연일 국왕 이야기만 주절주절대고...--;;
제가 원하는것은 이제 후안 카를로스 국왕의 퇴위식과 새국왕의 대관식 일정입니다만..ㅠ.ㅠ
당췌 이에 대해서는 말이 없군요...ㅠ.ㅠ
하여튼 글 안 읽어서 대충 다른곳에 썼던 글을 하나 가져옵니다.
계획 발표될때까지 뭘할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귀천상혼한 가문 이야기는 바텐베르크 가문 이야기를 해야할때인듯하네요.-0-;;;;;;;;;;;;;
이 글을 쓴 이유는 사실 텔레그라프 기사때문입니다. 후안 카르로스의 삶에 대해서 좋거나 나쁘거나 추악하거나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나왔는데 여기 good이라는 항목에 올라간것이 바로 이 쿠데타 시도때의 후안 카를로스입니다. 사실상 국왕의 퇴위가 "불명예"나 마찬가지라서 후안 카를로스의 인생 최고의 시기였던때를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아하하...
후안 카를로스 양위 특집 : 1981년 에스파냐 군부의 쿠데타 시도
1981년 2월 23일 쿠데타 세력의 에스파냐 하원 의회 장악
에스파냐는 오래도록 프랑코의 독재정치를 경험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프랑코는 후계자를 고려해야했으며 프랑코는 에스파냐의 전 국왕이었던 알폰소 13세의 손자였던 후안 카를로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결국 이것은 프랑코가 죽은뒤 에스파냐가 다시 군주제로 돌아갈수 있는 시초가 됩니다.
프랑코 생전에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와 군부에 충실한 인물처럼 보였습니다. 후안 카를로스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알폰소 13세의 아들들중 유일하게 계승권을 박탈당하지 않은 아들이었으며 그는 에스파냐 왕위계승요구자라는 신분에 걸맞는 여성인 부르봉-양시칠리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체데스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 바르셀로나 백작 부부의 장남이 후안 카를로스였죠.
후안 카를로스와 프랑코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 생전에 매우 지위가 불안정했었습니다. 특히나 프랑코의 아내인 카르멘 폴로의 야심때문에 더욱더 힘들게 됩니다. 카르멘 폴로와 프랑코 사이에는 외동딸밖에 없었는데 카르멘은 이 외동딸의 큰딸 즉 자신의 외손녀인 마리아가 후안 카를로스의 사촌과 결혼하면서 은근히 후안 카를로스가 아닌 자신의 외손녀사위가 국왕이 되길 바랬다고 합니다. 프랑코의 외손녀와 결혼한 인물은 앙주공작의 아들인 알폰소였습니다. 스스로 앙주공작이라고 칭했던 하이메는 알폰소 13세의 둘째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수술이 잘못되어서 청력을 상실했었죠. 에스파냐 왕실이 망명한뒤 하이메는 자신과 자신의 후손에 대한 왕위계승권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출신의 귀족여성과 결혼했죠.
이때문에 알폰소는 공식적으로는 에스파냐 왕위계승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프랑코의 외손녀와 결혼하면서 상황은 미묘하게 돌아갑니다. 알폰소는 왕위계승권이 없었지만 이제 프랑코와 인척관계가 되었으며 프랑코가 마음만 먹는다면 후계자는 쉽게 바뀔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죠.
프랑코의 외손녀와 알폰소 13세의 손자
후안 카를로스는 가문의 수장이었던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을 설득해서 알폰소에게 "카디스 공작"칭호를 부여해줍니다. 아마도 프랑코의 손녀가 "자칭 앙주 공작부인"이라고 불리는것이 부담감을 가졌었을듯합니다. 하지만 프랑코 사후에 카디스 공작지위는 상속되지 않는 지위라는것을 명확히 했습니다.
어쨌든 후안 카를로스는 이런 위기 상황을 잘 넘겼으며 결국 프랑코 사후에 1975년 에스파냐의 국왕이 됩니다. 국왕이 된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식의 정치체계가 아니라 입헌 군주국으로 정치체계를 변모시키기 시작합니다. 에스파냐는 오랜 내전으로 정치세력들간의 불신이 극에 달했었고 이를 해결하는 것이 최우선과제중 하나였습니다. 이때문에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의 체제를 바로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바꿔나갔는데 이런 상황은 군부의 불만을 사게 되죠.
국왕으로써 의회에서 첫 연설 중인 후안 카를로스
1981년 1월 후안 카를로스 아래서 정치체제를 바꾸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총리인 수아레스가 사임을 표합니다. 그 한달후인 1981년 2월 23일 수아레스의 후임으로 칼보-스토텔로를 총리로 선출하기 위해 의회에 의원들이 모였는데 이때 쿠데타가 시도 됩니다.(2월 23일날 일어나서 23F라고도 불린다고 합니다.)
중령인 안토니오 테헤로(Antonio Tejero)가 이끄는 일단의 군인들이 무장을 한 채 하원에 난입했으며 투표를 위해 모여있던 의원들을 인질로 잡습니다. 그리고 발렌시아 군의 사령관이 이에 발맞춰서 자신의 관할 지역에 계업을 선포하면서 호응하죠. 하지만 당시 군부 전체의 입장은 좀 복잡했는데 군부 전체가 이 쿠데타를 지지한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몇몇은 지지했지만 몇몇은 반응을 보류했으며 몇몇은 국왕과 의회에 충성을 확고히 했고 또 몇몇은 충성을 이야기했지만 쿠데타가 성공한다면 편을 바꿀 가능성이 충분했었다고 합니다.
에스파냐의 군사 작전 단위 지역
그리고 1981년 2월 24일 1시 에스파냐 육군 최고 사령관의 제복을 입은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방송에 나와서 연설을 합니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은 쿠데타를 거부하며 에스파냐 국왕이자 에스파냐 군 최고 통수권자로써 시민과 군인들에게 헌법을 수호하라고 명령을 내린다고 방송합니다.
이 상황은 곧 쿠데타의 실패를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24일 정오에 의회를 장악했던 인물들이 의회건물 밖으로 나와서 체포되었으며 쿠데타시도에 호응했던 장군들 역시 체포되기에 이릅니다.
쿠데타에 반대한다는 연설 중인 후안 카를로스
이 사건은 후안 카를로스를 오래도록 에스파냐의 "영웅"으로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는 국왕으로써 쿠데타 세력에 굴하지 않고 헌법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의무를 이행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만들었으며 오래도록 에스파냐 국민들은 이런 국왕을 존경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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