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엘입니다.
드디어 스튜어트 왕가 끝이군요.
이제 번외편으로 조지 1세의 부인이야기만 하면 될듯은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첼레의 조피 도로테아를 보면 참 남편 잘못만나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죠. 물론 부부사이 문제는 사실 일방적 책임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마누라 때리는 남편은 용서할수 없어요-0-;;;
그런데 슈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제가 좀 한미한 집안이긴 하나보네요. 부모 초상화도 안나온다는...-0-;;
영국의 왕비들...번외편 (6) 슈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제 : 영 프리텐더의 부인(첫번째)
슈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제
영 프리텐더의 부인
알바니 백작부인
Princess Louise Maximilienne Caroline Emmanuele of Stolberg-Gedern
(20 September 1752 – 29 January 1824)
슈톨베르크-게데른의 루이제 막시밀리안네 카롤리네 엠마누엘레는 1752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현재의 벨기에 지방)에서 슈톨베르크-게데른의 구스타프 아돌프(구스타프 아돌프 주 슈톨베르크-게데른)과 그의 부인인 호른의 엘리자베트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슈톨베르크 가문은 독일의 고위 귀족가문중 하나로 13세기 처음으로 문서에 등장한다고 합니다. 이후 여러 분가가 나뉘었는데 특히 슈톨베르크-게데른은 신성로마제국내의 통치가문으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루이제는 이 슈톨베르르크-게데른 가문 출신이었죠. 그녀의 아버지는 군인이었는데 루이제가 4살때 전사했다고 합니다.
루이제의 어머니인 호른의 엘리자베트는 호른의 막시밀리안의 딸로 그녀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고위 관료이자 합스부르크가문의 신하중 한명으로 "황금양모기사단 훈장"을 수여받을정도였다고 합니다.
16세기 슈톨베르크 백작가문 문장
아버지가 죽은뒤 루이제는 몽스에 있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곳은 주로 미혼 여성들이 머물던 곳으로 세상으로부터 그녀와 그녀의 재산을 보호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합니다. 1766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제를 수녀원의 참사원으로 임명합니다. 하지만 루이제는 비록 "수녀"의 지위에 있긴 했지만 실제로 수녀가 될 생각이 없었고 이 지위는 단지 적당한 남편감이 나타나기 전까지 임시적 지위였다고 합니다. 아마도 가부장적 사회에서 보호자가 없는 어린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합니다.
1771년 루이제의 여동생인 카롤리네는 3대 버윅공작의 아들인 자마이카 후작(후에 4대 릴라와 예리카 공작)과 결혼하게 됩니다. 버윅공작가문은 제임스 2세와 그의 정부였던 아라벨라 처칠의 아들이었던 제임스 피츠제임스의 후손이죠. 이때문이 이 가문은 전통적으로 "자코바이트"라고 알려진 제임스2세와 그 후손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됩니다. 3대 버윅공작의 숙부였던 피츠제임스 공작은 자코바이트들이 지지하는 영국의 국왕인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영 프리텐더)와 루이제와의 혼담을 추진하게 되죠. 이 혼담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사람은 바로 프랑스의 루이 15세였다고 합니다. 비록 그는 하노버 가문이 영국의 통치 가문이라고 인정하긴 했지만, 스튜어트 가문의 적통 왕위계승자가 단절되길 바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야만이 영국의 하노버 가문에 대한 견제에 스튜어트 가문을 이용할수 있었기 때문일듯합니다.
피츠제임스 가문 문장
결혼협상이 진행되면서 루이제의 가문에 돈이 거의 없다는것이 알려지자 협상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루이제를 위해 지참금을 마련해줬다고 합니다. 이것은 정치적의미보다는 지참금이 없어서 결혼하지 못하는 여성에 대한 마리아 테레지아의 호의였다고 합니다.
1772년 3월 28일 루이제는 파리에서 대리혼을 치뤘으며,1772년 4월 14일 자신보다 32살이나 많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와 이탈리아에서 결혼합니다. 결혼후 루이제는 자코바이트들에 의해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의 왕비"라고 공표되죠.
루이제와 영 프리텐더는 로마에서 살았습니다. 결혼초 둘은 나이차에도 행복했다고 합니다만 곧 둘 사이는 벌어지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영 프리텐더는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고 싶어했는데, 루이제는 결혼 2년동안 임신하지 못했죠. 게다가 영 프리텐더는 지속적으로 왕위를 되찾고 싶어했으며 유럽의 여러나라들로부터 지원을 얻고 싶어했지만 잘 되지 않습니다. 루이제는 자신이 왕비로 대접받길 원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름밖에 없는 지위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결국 후계자를 바랬던 영 프리텐더와 왕비 지위를 원했던 루이제가 서로가 원하는것을 얻지 못하자 서로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멀어진것이라 할수 있을듯합니다.
젊은 시절의 영 프리텐더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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