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데지레 클라리...번외편(1) 1810년경의 스웨덴 상황

엘아라 2013. 1. 8.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일요일까지는 끝낼줄 알았는데 주가 넘어가는 바람에 하던거 하려니 좀 어정쩡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번외편으로 넣어볼까합니다.(안되면 스웨덴 왕가 계보도를 그릴수도 있어요-0-;;)


[새해특집]데지레 클라리...번외편(1)1810년경의 스웨덴 상황


스웨덴은 오래도록 신권과 왕권이 투쟁을 벌였던 나라입니다.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루었던 시기는 바로 스웨덴의 전성기였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때였습니다. 이때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군주이자 장군이엇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를 중심으로 신하들이 똘똘 뭉쳐서 국왕에게 절대적 신임을 보이고 있었던 시기였죠. 하지만 이후 구스타프 2세 아돌프가 전사한 이래 스웨덴의 신권은 점점 강해지고 왕권은 점점 약해져갔습니다. 유럽의 여러나라들이 "절대왕정"을 추구하던 시기에도 스웨덴의 국왕은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했었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구스타푸스 아돌푸스"라는 라틴어명으로 더 잘알려져있는 그는 스웨덴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듣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를 통해 국왕의 실권을 잡은 사람이 바로 구스타프 3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불만을 품은 장교에 의해서 암살당했고 그의 어린 아들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즉위하게 되죠.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재위하던 시기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스웨덴은 프랑스와 우호관계였는데 대혁명이 일어나자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프랑스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합니다. 사실 러시아의 황제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동서로 그와 황후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프랑스에 적대한다면 자신들이 선전포고를 할것이라고 경고를 했었습니다만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아랑곳하지 않았죠. 이때문에 스웨덴은 러시아에 핀란들르 뺏기게 됩니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


핀란드를 뺏기게 된 스웨덴에서는 국왕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일단의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시켰고, 국왕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인 칼을 칼 13세로 즉위시켰죠. 늙은 국왕이었던 칼에게는 후계자가 될만한 자녀가 없었고 결국 스웨덴에서는 왕위계승자 문제가 발생합니다.


쫓겨난 구스타프 4세 아돌프에게는 이미 후계자인 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왕실에서는 왕세자였던 구스타프를 왕위계승자로 밀고 있었습니다. 사실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망명해야했을때 칼 13세는 조카며느리이자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아내였던 프레데리카 왕비에게 자신을 지지한다면 그녀의 아들인 왕세자를 자신의 후계자로 승인하겠다는 제안을 했었을정도라고 합니다.(물론 프레데리카는 이를 거절했고 자신의 남편만이 국왕이라는 입장을 확고하게 했었습니다.)

어쨌든 왕세자였던 구스타프를 왕위계승자로 지지했던 인물들중 대표적 인물이 칼 13세의 아내이자 국정에 강하게 관여했던 샤를로타 왕비와 총리였던 악셀 폰 페르센이었습니다.(...마리 앙투아네트 이야기의 그 페르센입니다.) 페르센 백작은 자신의 숭배 상대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망한뒤 혁명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있었으며 스웨덴에서 혁명이 일어나는것을 어떻게든 막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확고하게 이전 국왕의 아들이자 왕위계승자였던 구스타프를 제자리로 돌릴려고 했었죠.



샤를로타 왕비

칼 13세의 왕비


하지만 귀족 중심의 의회는 전횡을 일삼고, 잘못된 대외 정책으로 핀란드를 상실했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에게 이미 등을 돌린 상태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의 아들이 왕위계승자가 된다는것은 생각할수도 없는 일이었죠. 스웨덴 의회는 칼 11세의 딸이었던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이후 "왕위계승자를 선출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구스타프 3세때 국왕의 쿠데타로 인해서 의회의 권리가 약화되긴했었지만, 다시 의회의 권한이 강해진 지금 왕위계승자는 당연 의회에서 선출하는 것이었으며 의회의 중심인물들은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아들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웨덴은 고립된 상황이었는데, 덴마크는 전통적으로 스웨덴의 적이었으며 러시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통적인 우방이었던 프랑스는 혁명이 일어난 뒤 스웨덴의 선전포고로 적국이된 상황이엇습니다. 스웨덴은 늘 적들에 둘러쌓여져있었으며 이런 위기상황을 가장 잘 극복한 국왕이 "선제공격"을 펼쳤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스웨덴은 이런 선제공격을 할만한 상황이 아니었으며 주변 국가중 하나라도 자신의 편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스웨덴에서 거론된 사람들은 덴마크 방계왕가 출신이었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데르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칼 아우구스트공과 당시 스웨덴 왕가와 친척관계였던 올덴부르크 공작 페테르였습니다. 페테르는 러시아 황제와 이종사촌간이기도 했었죠. 또 이둘의 잇점중 하나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은 노르웨이에서 인기가 많았기에, 당시 스웨덴에서는 노르웨이를 합병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며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이 국왕이 된다면 이에 유리할수 있었죠. 또 러시아쪽의 페테르 공작이 뒤를 잇는다면 러시아와의 우호관계 때문에 핀란드를 돌려받을 가능성이 열리게 되는 것이었죠. 

한편으로는 스웨덴의 귀족 장교들은 "구스타프 2세 아돌프"시절처럼 강력했던 스웨덴을 재건해줄만한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은 이런 지도자에 걸맞는 사람들로 여겨졌었습니다. 장교들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정치세력들은 "프랑스 육군 원수"중 한명을 왕위계승자로 선출하길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작 칼 구스타프

스웨덴의 왕세자


사실상 러시아가 핀란드를 돌려줄 가능성이 적었기에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이나 프랑스 육군 원수가 왕위계승자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죠. 국왕 부부는 한겨같이 왕세자였던 구스타프를 왕위계승 후보자로 주장했지만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국왕 부부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공을 왕위계승자로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1810년 왕세자가 되었던 칼 아우구스투스가 갑자기 사망합니다. 그가 죽자 스웨덴에서는 구스타프를 지지했던 사람들이 칼 아우구스투스를 살해했다고 소문이 퍼져갑니다. 결국 왕세자의 장례식때 구스타프를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페르센 백작이 군대의 방조아래 군중에 의해 살해됩니다. 또다른 핵심 인물이었던 샤를로타 왕비는 공포에 질려서 자신도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처형당할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악셀 폰 페르센

그는 칼 아우구스투스가 죽자 "더 이상 프랑스 육군 원수를 왕위계승자로 들이는것을 막을수 없다"라고 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칼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한뒤 스웨덴 의회는 강력하게 프랑스 육군 원수를 왕위계승자로 고려하게 됩니다. 국왕 부부는 구스타프가 안된다면 올덴부르크 공작을 왕위계승자로 선택하려했습니다. 하지만 의회는 이미 "프랑스 육군 원수"를 후계자로 점찍은 뒤였죠. 그리고 그들은 스웨덴의 왕위계승후보자로 폰테코르보 공이였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 장군을 선택합니다.


더하기

이후 왕위계승자 선출 과정은 저의 앞쪽 포스트인 "베르나도트의 왕위계승자 선출 과정 (http://blog.daum.net/elara1020/8464416/)를 참조해주세요


자료출처

1. Bernadotte and Napoleon : 1763-1810 (Barton,1921)

2.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