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특집

[새해특집]데지레 클라리 :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 ...(7) 스웨덴의 왕세자비

엘아라 2013. 1. 6.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새해특집]데지레 클라리 : 스웨덴의 데시데리아 왕비 ...(7) 스웨덴의 왕세자비


데지레의 삶을 크게 변화시킨 사건이 1810년 일어납니다.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였던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이 사망한것이었죠. 사실 스웨덴의 왕위계승자와 데지레는 그다지 관계없어 보였습니다만 데지레가 관심 없었던 정치적 문제는 데지레와 스웨덴을 관계짓게 만듭니다.


이전에 스웨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나서 국왕인 구스타프 4세 아돌프를 쫓아내고 그의 숙부인 칼 13세를 즉위시켰습니다. 칼 13세에게는 후계자가 없었고 이때문에 덴마크 왕가와 가까운 친척이었던 아우구스텐보리 공작을 왕위계승자로 세웠습니다. 그가 왕위계승자가 된것은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합병하는데 효과적일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가 죽자 스웨덴은 다시 왕위계승자 문제에 휩쌓입니다. 국왕과 왕비는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아들인 구스타프를 지지하고 있었는데, 스웨덴 귀족들은 그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스웨덴의 위대한 국왕이었던 구스타프 2세 아돌프와 같은 강력한 군주를 원했고 그들이 눈을 돌린 사람은 바로 나폴레옹의 육군 원수들이었죠. 그들에게 가장 친숙한 사람은 바로 베르나도트였습니다. 베르나도트는 스웨덴과의 전투를 한적도 있었고 이때 스웨덴 장교들을 포로로 잡았는데 그들에게 잘 대해줬었습니다. 또 베르나도트는 독일 북부 지방이었던 한자동맹지역의 총독도 지냈었는데 베르나도트의 통치는 한자 동맹의 도시들이 다시 재기하는데 기여했었습니다. 한자 동맹 도시들은 스웨덴과도 자주 교역하는 곳이었기에 베르나도트에 대해서 더 잘 알려지게 되었죠. 나폴레옹은 스웨덴인들의 생각에 그리 탐탁해하지 않았지만 베르나도트가 스웨덴 왕위계승자로 선출되는 투표에 나갈수있도록 승락했고,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에서 투표를 통해서 왕위계승자로 선출되었습니다.




1811년

스웨덴의 왕세자 칼 요한



베르나도트의 상황은 데지레를 파리에서 떠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르나도트는 나폴레옹이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 스웨덴인들이 선출한 사람이었고 이것은 베르나도트와 데지레가 프랑스 국적을 버리고 완전히 스웨덴인으로 이민가야하는 것이었죠. 파리를 떠나는것을 싫어했던 데지레에게 이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었습니다만 그녀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남편과 아들이 미리 떠난 뒤 그녀는 겨울에 스웨덴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스웨덴에서 매우 불행했었습니다. 겨울철 스웨덴은 매우 어둡고 추운지역이었고 남부지방 출신인 데지레에게는 무척이나 낯선 환경이었습니다. 또 스웨덴 궁정내에서도 데지레에게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왕비이자 양시어머니였던 샤를로테 왕비는 데지레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녀가 프랑스인으로 자신의 새조국을 거들떠 보려하지도 않으며, 아들을 품안에 싸고 돌아서 아이를 망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궁정을 주도하는 왕비의 이런 의견은 데지레에게 다른 사람들도 불친절하게 대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비록 궁정 사람들이 교양어로 프랑스어를 쓰긴 했지만 스웨덴어를 모르는 데지레는 스웨덴 궁정에서 고립된 상황이라고 느꼈을듯합니다. 데지레가 스웨덴에 있을때 호의적이었던 몇 안되는 사람중 한명이 바로 구스타프 4세 아돌프의 어머니였던 소피아 마그달레나 왕비였습니다.(그녀는 젊은 시절 시어머니인 로비사 울리카 왕비가 매우 불친절해서 궁정에서 힘들었던 경험이 있었고 이때문에 며느리나 데지레에게 호의적이었다고 합니다.)



스웨덴 궁정 예복을 입은 데지레


이런 불화와 추운 날씨등은 데지레를 스웨덴에서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고 결국 데지레는 프랑로 돌아오게 됩니다. 데지레는 파리로 돌아와서 스웨덴에서의 야야기는 단지 "매우 추웠다"라고만 언급했다고 합니다.


파리에서 데지레는 스웨덴의 왕세자비가 되기 전과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언니 쥘리와 함께 있었으며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과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죠. 그녀는 스웨덴  왕세자비로 살롱을 열었는데 그녀의 살롱에는 많은 친구들이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스웨덴 왕세자비였으며 이때문에 주로 스웨덴 인들이 데지레의 살롱을 찾게 됩니다. 특히 스웨덴 대사는 정기적으로 데지레의 살롱을 방문하는 인물중 한명이었죠.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쟁이 심각해지면서 데지레의 살롱에는 점차 반 나폴레옹 파들의 사람들이 더 많이 몰려들게 됩니다. 하지만 데지레는 늘 정치적인면에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만 나폴레옹의 전쟁이 진행되면서 껄그러운 상태가 됩니다 나폴레옹은 데지레가 프랑스에 있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만 그녀를 국외로 추방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민감한 시기에 파리에 있는것을 원치 않았기에 데지레는 친척들과 함께 여러곳으로 다니기도 했었습니다.



1812년 

황제 나폴레옹


나폴레옹 전쟁동안 데지레는 큰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녀는 프랑스의 적국의 왕세자비였으며, 자시의 수많은 친척 친구들은 군대에 있었는데 그들과 남편이 대적하게 된 것때문이었습니다. 늘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것을 원했던 데지레에게 이런 상황은 고통스러운것이었습니다. 훗날 데지레는 이상황에서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사람은 제롬 보나파르트의 부인이었던 뷔르템베르크의 카타리나였다고 합니다. 카타리나는 데지레의 처지에 가슴아파하면서 데지레에게 용기를 줬었다고 합니다. 

재미난것은 당대 나폴레옹 주변의 많은 이들이 베르나도트의 행위를 배반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담 쥐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베르나도트는 자신을 선출해준 나라에 의무가 있으며 그걸 해야하는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뷔르템베르크의 카타리나

제롬 보나파르트의 아내

그녀의 고모가 러시아의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로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와는 사촌관계였죠.



데지레는 나폴레옹이 몰락한뒤에도 프랑스에 남았었는데 그녀의 많은 친척들과 친구들을 돕는데 열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인 칼 요한은 스웨덴의 왕세자로 동맹군의 일원이었으며 그녀는 친척들이나 친구들을 도와줄수 있는 영향력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칼 요한은 프랑스에 잠시 왔었지만 다시 프랑스를 떠났고 더 이상 유럽의 문제에 관여하지 않게 됩니다. 데지레는 남편을 따라가지 않았는데 그녀는 특히 언니 쥘리와 떨어지는것을 무척이나 어려워했습니다. 쥘리는 왕정이 복고된후 보나파르트 가문 사람들이 프랑스에 머물지 못하게 하게 되자 스위스로 가야만했는데 데지레는 언니를 "스웨덴 왕세자비의 손님"으로써 프랑스에 초대했고 자신의 보호아래 함께 있도록 하기도 했었습니다.


데지레의 남편은 데지레가 늘 스웨덴으로 돌아오길 바랬지만 그녀는 스웨덴으로 갈 엄두를 내지를 못하고 있었죠.



자료출처

1.A Queen of Napoleon;s Court : the life-story of Desiree Bernadotte(C.Bearne,1905)

2. Bernadotte and Napoleon :1763-1810 (D.P. Barton,1921)

3. The Amazing Career of Bernadotte 1763 to 1844 (D.P.Barton)

4..위키피디어(프랑스어+구글번역)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