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22)마리아 크리스티나 :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

엘아라 2012. 12. 25. 06:00

안녕하세요 엘입니다.


사실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뭘 할려고 했더니 아이디어가 영 없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하던거 하기로 했습니다.

합스부르크가문 여대공들이 어찌나 많은지..ㅎㅎㅎ

(이거 끝나고 에스파냐 시리즈로 할겁니다. ㅎㅎㅎ)


합스부르크의 여대공들...(22)마리아 크리스티나 : 페르디난트 1세의 손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트란실바니아의 공비

Maria Christierna of Austria 

(10 November 1574 – 6 April 1621),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Inner Austria의 통치자였던 대공 카를 3세와 그의 아내인 바이에른의 마리아 안나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온화하고 겸손하며 신앙심이 깊은 여성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녀는 라틴어도 매우 잘했다고 알려져있으며 당시 왕실 여성들이 받을수 있는 최상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비록 외모가 아름답다고 알려진것은 아니었지만, 진지하고 순수한 외모로 알려지게 됩니다.



어린시절의 마리아 크리스티나


1595년 마리아 크리스티나에게 혼담이 들어옵니다. 바로 트란실바니아의 군주였던 지그문트 바토리와의 혼담이었죠. 이것은 지그문트 바토리의 측근이었던 Bocskay의 조언에 따른것으로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해서 신성로마제국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죠. 트란실바니아와의 동맹을 위해 황제였던 루돌프 2세는 사촌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트란실바니아의 군주인 지그문트 바토리와 결혼시키기로 결정했었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와 함께 결혼하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로 갑니다만, 가는 도중 아프게 됩니다. 이때문에 결혼이 잠시 미뤄지게 되지만 결국 1595년 8월 지그문트 바토리와 결혼하게 되죠.



지그문트 바토리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지그문트 바토리는 불행해지게 됩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처음에 트란실바니아로 갔을때 지그문트 바토리는 그녀에 대해서 나쁘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만, 이후 그는 결혼한뒤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사이가 좋지 않게 됩니다. 특히 지그문트 바토리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결혼을 "완성"하길 거부하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요새로 보내서 사실상 유폐시키죠. 결혼을 완성시키지 않은 이유는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이혼에 문제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을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크리스티나와의 관계가 좋지 않게 된것은 정치적 목적이 강해서였을듯합니다. 신성로마제국과 트란실바니아는 미묘한 관계였고,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사촌인 루돌프 2세는 트란실바니아를 완전한 제국의 영향아래 두려했었으며, 이에 지그문트 바토리가 저항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지그문트 바토리의 지위가 변하는 1598년까지 유폐되어있었습니다. 지그문트 바토리가 퇴위한후,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결혼 협정에 따라 트란실바니아의 통치자로 트란실바니아에 남아있어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단독 통치자라기 보다는 루돌프 2세의 대리인 정도에 불과햇었죠. 하지만 지그문트 바토리는 곧 다시 트란실바니아의 군주 자리를 되찾았으며 아내와도 화해하는듯 보였습니다만 복위한 뒤 아내를 다시 유폐시켜버립니다.



지그문트 바토리


1599년 지그문트 바토리가 다시 퇴위해야했을때,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이제 남편과 트란실바니아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했죠. 그리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결혼 무효를 교황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로써 지그문트 바토리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죠. 이후 1607년 동생인 엘레오노르와 함께 수녀가 되어서 조용한 삶을 살았습니다.



마리아 크리스티나

전 트란실바니아 공비

오스트리아의 여대공


자료출처

위키 피디어

그림출처

위키 미디어 커먼스